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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오스만의 '불꽃여인' 이스탄불의 금빛 장미 ‘휘렘' 하세키 술탄 (Hürrem Haseki Sultan)

"우웩! 웩!”
생전 처음 타보는 거대한 목선. 노예선의 갑판 아래는 비린내, 땀 내, 음식 냄새, 온갖 악취가 섞여 창자까지 뒤트는 듯한 배멀미를 더했다.
비천하고 무식한 뱃 놈들의 비아냥거림과 희롱은 더 참을 수 없었다.
가져다주는 음식을 쏟아버리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다.
“나를 당장 고향으로 돌려보내란 말야!!!!”...

돌아오는 건 불이 번쩍하는 따귀 뿐이다.

 

성직자의 딸에서 한순간 노예로

 

알렉산드라는 꿈을 꾸는 듯했다. 고향인 우크라이나 로하틴 지방의 조용한 마을에 타타르족 노예사냥군들이 들이닥쳤다. 저항하는 남자들은 너나없이 죽어 나갔고 집들은 불탔으며 포로가 된 사람들은 굴비처럼 엮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마을 정교회의 사제였던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육받아 온 10대 소녀에게는 너무나도 두렵고 충격적인 순간들이었다. 

 

어부들이 실한 생선을 고르듯 타타르 도적들은 건장한 남자, 약골 또는 병자, 젊고 아름다운 처녀, 늙었거나 박색한 여자로 포로들을 분류했다.

알렉산드라타타르인들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여러 날 동안 윽박을 당한 후 크림반도에 있는 크림칸국의 궁정으로 끌려갔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이곳 크림칸국 궁정의 후궁 또는 하녀로 인생을 마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서 여러 날을 보낸 알렉산드라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이 배에 옮겨타게 됐다.

출렁이는 풍랑보다 더한 절망과 고통 속에 파김치가 되어 도착한 곳은 당시 16세기 세계의 중심 大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 경외의 대상이던 오스만 제국 황제의 궁에, 그중에서도 은밀하고 관능적인 금남의 집 '하렘'에 배치됐다.

그곳에는 지중해 각국에서 선발된 다양한 인종과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미인들 중 미인만 모여있었다.

개중에는 알렉산드라처럼 노예로 끌려온 여성들도 있었다.

 

▲포로가 된 소녀 알렉산드라의 인생 여로(旅路)

 

하렘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서 생활하며 세련되고 우아한 옷과 장신구, 화장으로 치장한 미인들이 가득했다.
알렉산드라가 들어서자 수 많은 시선이 온몸에 꽂혔다. 하렘의 여인들에게 신입이란 언제나 달갑지 않은 법!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라이벌이 들어 온 셈이니 말이다.

 

하렘의 여인...다시 격랑 속으로

 

하렘에서는 온갖 법도를 배워야 했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먹는 예절을 배웠다. 특히 황제가 가까이 있을 때는 절대 고개를 들어서도, 먼저 말을 걸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는 점은 반드시 명심해야 했다.

 

성직자의 딸이라 얌전하고 조신할 것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렉산드라는 당찬데다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했다.

‘고참’들의 텃세와 하렘 교관들의 닦달에도 알렉산드라는 굴함이 없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도 알렉산드라는 고향의 민요를 부르며 즐겁게 일했지만 남들의 부당한 지시나 간섭에는 바락바락 대들며 저항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각오였을까?


그러던 어느날 황제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황제의 씨가 뱃속에서 자라나 아들만 낳는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거야.

여기 있는 모든 여인들에게 희망의 빛은 오로지 황제의 사랑 뿐이지. 그리고 그의 아들을 생산하는 것”

알렉산드라는 그 말을 듣자 머리가 번쩍했다.
‘그래! 슐레이만(황제의 이름)의 눈에 들자. 그의 아들을 낳자. 그리고 하렘 모든 여인의 머리가 되는 거야’

 

하지만 무슨 수로 황제의 눈에 든단 말인가? 그가 하렘에 나타나도 나는 그를 쳐다볼 수 없다. 감히 말도 못 건넨다. 그리고 이 수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 육감적인 몸매, 다양한 머리 색깔과 화려한 눈동자의 미녀들...
그 중에서도 나는 너무나 평범해....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운명의 길은 거기에...황제의 품으로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궁정 여인들의 암투는 끊이지 않았던 법. 당시 오스만투르크 왕궁의 여인천하 ‘하렘’에서도 당연히 여인들의 끊임없는 다툼이 있었고 탄탄한 서열이 존재했다. 우선, 슐레이만의 생모(生母) 하프사 발리데술탄이 하렘의 지배자였고, 뒤를 이어 슐레이만의 아들을 낳은 마히데브란 하툰귈펨 하툰이 이 여인천하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 황제의 어머니를 칭하는 호칭으로, 슐레이만이 황위에 오르고 이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슐레이만 이전에는 하툰(Hatun)이라고 불리었다니, 황모(皇母)도 일개 후궁의 직위로 인식했던 오스만제국의 여성관을 짐작할 수있다.

* 하툰(Hatun): 하렘의 여인들 중 황제의 후궁이 된 여인에게 붙여졌던 칭호.

 

알렉산드라가 이들의 아성을 뚫고 슐레이만의 사랑을 쟁취해 하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남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도발(?)을 감행했다. 어느 날, 황제가 하렘을 방문했다. 여인들은 모두 도열 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왕을 따르는 대신들과 하렘의 교관들은 이 초긴장 상태가 어서,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랐다. 하렘의 여인들은 감히 슐레이만의 얼굴은 커녕 허리 위 쪽에 조차도 시선을 올릴 수 없었다.
 

이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슐레이만 황제님!”
아! 감히! 감히! 여자가 황제를 쳐다보는 것도 모자라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인 ‘슐레이만’의 이름을 부르다니....

모두가 경악했지만 가장 놀란 것은 황제였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당돌하게 자기와 눈을 맞추고 서 있는 저 소녀는 도대체 제 정신인가?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서!
 

슐레이만이 소녀에게 다가가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당돌하다 못해 미친 소녀 알렉산드라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슐레이만이 알렉산드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알렉산드라는 그만 맥이 탁 풀리며 무너져 내리듯 쓰러진다. 슐레이만은 직접 알렉산드라를 낚아챘다. 그리고 팔에 안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극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입가에 웃음까지 띄고 있다니!"

황제는 황당함과 당혹감 속에서도 이 '하렘의 신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오스만 투르크 황가의 오랜 불문율이 깨지고 제국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작은 출발점이었다.

 

어디서나 휘렘, 언제나 내 행복의 근원 
 

당시 오스만투르크 황궁에는 재상 이브라힘 파샤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 출신 피정복민이지만 어릴 적부터 황제와 친구처럼 지냈다. 명석한 두뇌와 냉정한 판단력, 무서운 실행력을 인정받으며 황제의 총애를 얻은 그는 총리대신까지 올라 섰고 슐레이만 황제의 여동생 하디제와 결혼함으로써 황가의 사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렘에서의 해프닝이 있은 후  슐레이만의 머리속에는 알렉산드라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절세의 미인은 아니지만 통통한 볼륨에 파란눈을 가진 이상한 매력의 금발 소녀.

 

이브라힘알렉산드라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슐레이만의 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대놓고 그녀를 침소에 들이라는 명을 내리지 못하는 황제의 체면까지 간파한 이브라힘은 알렉산드라의 알몸에 비단천만 감겨 황제의 침소에 들여보냈다.

방으로 들어서는 알렉산드라를 보는 슐레이만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슐레이만알렉산드라의 첫 날 밤.

16세기 초 오스만투르크 제국 황제의 어느 은밀한 하룻밤은 이후 수 많은 역사서와 연극, 미술, 음악과 문학에 회자되는 '세기의 사랑'의 시작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단숨에 하렘여인들의 부러움과 시기, 한편으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특히, 황태자 무스타파의 생모 마히데브란 술탄과 또 다른 왕자의 어머니 귈펨 하툰의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들은 알렉산드라를 그저 황제의 '한 때의 심심풀이' '지나가는 바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 아니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알렉산드라를 향한 황제의 마음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년같았다. 

스스로를 '무힙비(Muhibbi)'(사랑에 미친 남자)라 칭하면서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나의 목숨과 같은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이, 아름다움의 제왕인 나의 술탄"이라지 않나 "나의 행복의 근원, 내 안의 달콤함, 유쾌한 나의 잔치, 밝게 빛나는 나의 빛, 나의 불꽃.나의 오렌지, 나의 석류, 나의 귤, 나의 밤의 침실의 빛"이라는 농염한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 아닌가?

(슐레이만 대제가 휘렘에게 바친 연애시 중)

 

슐레이만알렉산드라에게 '즐거움'의 뜻을 가진 '휘렘'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휘렘은 황제의 더 없는 즐거움이 됐으나 황궁의 모든 이에게는 단단하고 거대한 공공의 적이 됐다.

그녀를 황제의 침소에 들여 자신의 '정보망'으로 삼으려했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조차도 말이다.

 

한 사내의 사랑, 모든 이의 적

 

슐레이만 1세 (재위 1520~1566)는 오스만투르크의 10대 술탄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융성은 물론 영토까지 크게 확장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총 13회의 군사원정을 지휘해 부다페스트 (現 헝가리 수도)와 베오그라드 (現 세르비아 수도) 등 유럽의 유서깊은 도시들을 비롯해 페르시아 지역과 북아프리카 해안선 전역을 확보한 오스만제국의 정복왕이다.

 

▶ 슐레이만 1세 통치 기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영역

 

슐레이만은 전장에서도 늘 일기와 편지를 썼으며 시(詩)를 음미한 풍부한 감성의 사나이였다. 

이런 로맨틱 가이의 순정(?)을 사로잡은 휘렘의 파워는 제국의 권력을 송두리째 거머쥔 것에 다름 없었다.

그녀의 힘의 원천은 슐레이만의 불타는 사랑이었기에 휘렘은 그 불꽃이 꺼져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행여라도 황제의 사랑이 심드렁해지면 마치 머리카락을 밀린 삼손처럼 휘렘의 권력도 연기처럼 사라질테니까 말이다.

 

황제의 어머니 하프사와 황태자 무스타파의 생모 마히데브란, 그리고 황제의 여동생이자 재상 이브라힘의 아내인 하디제야말로 황제와 휘렘의 사랑에 금이 가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휘렘의 모든 행동이 꼴보기 싫었고,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황제가 야속했으며, 무엇보다 휘렘의 존재야말로 자신들의 안락한 미래를 깰 철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막연한 불안감은 잔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오스만의 '룰'을 부수고....진정한 황후로

 

슐레이만은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우크라이나 로하틴의 노래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 붉은 머리에 파란눈, 하얀 피부. 그리고 당시 여자답지 않은 해박한 지식과 어쩌다 한마디 툭툭 던지는 명쾌한 정치적 해법은 황제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황제의 정책에 그녀의 조언이 비중있게 반영됐다는 역사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와 슐레이만이 휘렘에게 바치는 사랑의 詩에서 볼 수있듯 그녀는 황제의 정서, 정치적 판단, 사적인 모든 것에 만족감을 준 여인임에 틀림없다.

 

한편 휘렘도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무스타파가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내에서나 백성에게나 칭송이 자자했다.

황태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에 더해 행정적으로 유능했으며 군(軍) 통솔력에서도 다부진 면모를 보여줬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왕궁에는 두가지 독특한 관습이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죽어 아들 중 누군가 황위를 잇게 되면 다른 황자(皇子)들은 모조리 죽이는 잔인하고 냉정한 법령이다. 정권 초기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한 읍참마속이라지만 죽임을 당하는 황자들과 그들을 낳은 어머니들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또 하나는 오스만제국의 황제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법률이다.

왕자나 공주의 어머니건, 심지어 황태자를 낳은 여인이라도 그저 하렘의 여인이었다. 황제의 사랑이 크고 작음에 따라 권력의 크기도 크고 작음의 차이일 뿐 하렘의 여인들은 법률상으로 동등한 지위였다.

 

오스만투르크는 1402년 티무르제국과 벌인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1370~1405)에게  패해, 술탄 바예지드 1세(4대 황제) 가 생포된다. 이때 함께 끌려간 황제의 아내가 티무르에게 직접 술을 따르며 희롱당하는 큰 치욕을 겪었다. 오스만투르크는 이후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수치를 겪지 않기 위해 아예 황후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들이 나왔다. 여기에 외척들의 발호를 원천봉쇄한다는 명분이 더해져 '황제결혼금지'라는 기괴한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법령은 휘렘에게 절박한 동기부여가 됐다.

이대로라면 무스타파가 황제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휘렘은 자신이 낳은 아들 5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  상황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한명의 아들은 살려야한다고 되내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했다. 

 

휘렘은 황제와의 결혼이 필요했고 그걸 발판으로 아들 중 한 명을 황제에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휘렘의 무서운 집념과 휘렘을 향한 황제의 불타는 사랑은 오스만투르크의 오랜 법령을 바꾸게 된다.

1533년 황제는 휘렘을 후궁 신분에서 해방했다. 휘렘과 결혼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이듬해인 1534년, 황제의 어머니 하프사 술탄이 사망하자 황제는 휘렘과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녀를 황후로 앉히고야 말았다.

 

일찍이 사랑하는 여동생 하디제이브라힘의 결혼식을 오스만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치뤄준 황제는 자신과 휘렘의 결혼식은 그것보다 훨씬 화려하게 거행했다.

 

황제는 또한 휘렘에게 하툰 대신 황족의 여인들에게만 붙여졌던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휘렘을 당당한 황실의 일원이자 최초의 공식적인 황후로 인정한 것이다.

휘렘이 행복과 영광으로 빛날 때, 라이벌들의 가슴에는 못이 박혔다.

 

 

정적(政敵) · 라이벌 도장깨기

 

휘렘은 순진한듯 냉혹했고 천진한듯 치밀했다.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과 공작과 음모, 조작을 서슴지 않는 정치본능이 공존했다.

 

휘렘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슐레이만이 불러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황제의 침소에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파서, 어느 날은 종교적 각성으로, 또 어느 날은 왕자가 열이 심해 간호를 해야해서...

 

참다 참다 화가 난 황제가 직접 휘렘의 처소로 향했다.

그런데...휘렘의 얼굴에 굵은 손톱자국과 목덜미에는 피멍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휘렘은 "이꼴로 황제의 처소에 나갈수 없었노라"며 눈물을 뚝뚝흘렸다.

황제는 격노하며 일의 경위를 물었다.

범인은...황태자 무스타파의 어머니이자 휘렘의 최대 라이벌 마히데브란 술탄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어느 날 휘렘은 작심하고 마히데브란에게 도발했다. 말끝마다 깐족거리고 신경을 건드렸다. 참다 참다 격분한 마히데브란이 달려들었다. 두 여자가 서로의 머리채를 잡기도 전에 주변의 시녀들이 재빨리 뜯어말려 몸싸움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휘렘은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얼굴과 목에 손톱자국과 멍자국을 냈다.

이 다툼이 말많은 여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싸움의 강도도 침소봉대 됐을 것이다.

황제는 목격자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는데, 이미 황제의 전부가 된 휘렘으로부터 겁박을 받았거나 매수된 궁녀들의 입에서는 마히데브란에게 불리한 진술만 나왔다.

 

명색이 황태자의 어머니이고 황태자시절의  슐레이만 설레게 했던, 어쩌면 첫 사랑인 마히데브란에 대한 황제의 '그나마 남은' 정은 여기서 뚝 끊기게 됐다고 한다.

황후가 되기 훨씬 전, 일개 후궁에 불과했을 때, 황태자의 어머니를 상대로 이런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고, 결국 승리해 낼 만큼 휘렘의  전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명실공히 오스만투르크의 안주인이 된 휘렘의 앞날에는 그래도 남은 걸림돌이 있었는데....

황제의 여동생 하디제의 남편이자 제국의 실세 이브라힘 파샤였다.

무스타파 황태자의 듬직한 후원자이자 강력한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휘렘으로선 버거운 상대였다.

그리스 출신 피정복민 신분의 핸디캡을 깨고 제국의 2인자로 우뚝 선 이브라힘의 지략과 정치력, 그리고 백성들의 지지는 넘기 힘든 산처럼 보였다.

 

황제의 굳건한 신임을 바탕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노예출신의 大천재 이브라힘.

남녀의 사랑과 군신간의 신뢰는 전혀 다른 줄기였으나 휘렘은 이 조차도 황제의 애정을 양분해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휘렘무스타파의 튼튼한 후원자 이브라힘을 먼저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라이벌 제거에 가장 강력한 엔진은 단연 역모(逆謀)로 몰아넣기다.  

 

황궁에 부는 피바람

 

늘 그렇듯 군주가 오랜 충신을 내치거나 죽일 때는 사소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휘렘은 이브라힘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죽임을 당하게 된 재상 이스칸데르 첼레비(İskender Çelebi) 처형장에서 "진짜 반역을 꾸민 것은 이브라힘이니 그를 죽이소서"라고 절규하며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휘렘이스칸데르 첼레비가 죽으며 물귀신 작전으로 내뱉은 '이브라힘 역모설'을 황제에게 집요하게 상기시켰다.

 

휘렘사파비 왕조와의 전쟁(1532~1555)에서 공을 세운 이브라힘이 스스로를  '세라스케르 술탄(Serasker Sultan)'이라 참칭한다는 것도 문제삼았다.

휘렘은 황제에게 "세라스케르는 오직 황제만이 전쟁영웅에게 붙여줄 수 있는 영광스런 칭호인데 감히 스스로를 그렇게 일컷다니 이는 황제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물고 늘어졌다. 황제도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계속되는 휘렘의 모함에 슐레이만도 서서히 이브라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1536년 3월 15일 잠자고 있는 이브라힘의 침소에 자객들이 잠입했다.

목에 걸린 밧줄이 팽팽해지면서 이브라힘의 의식도 점점 소멸돼 갔다. 43세의 불꽃같은 삶이 그렇게 졌다.

 

슐레이만의 마음도 착잡했다. 

제국의 골칫거리 이집트의 행정과 군사문제를 깔끔하게 정립해 놓은 것도, 유럽의 패권국 합스부르크와 강화를 통해 헝가리의 60%를 오스만제국의 영토로 편입해 온 것도 이브라힘 아니었던가?

형제처럼, 심지어 황궁 대신들이 동성애 아니냐고 수군거릴 정도로 가까웠던 이브라힘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

 

하디샤는 당장 황제를 찾아갔다. 더할 수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던 오라버니가 남편을 죽이다니... 하디샤슐레이만 앞에서 미친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저 광기의 화신, 살인자, 오라버니는 물론 제국까지 망쳐버릴 이방의 악마를 당장 내치소서. 아니 극형으로 처벌하소서"라며 휘렘을 저주했다.

다시는 황제 앞에 서지 않겠노라며 황궁을 나선 하디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남편이 죽은 지 2년 후 생을 마감했다. 자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황제가 영혼의 동반자로 여기던 이브라힘을 죽였다. 황제는 이제 휘렘의 말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내 아들 무스타파의 목숨도 이제 휘렘의 손에 달린 것 아닌가!.....마히데브란은 이런 생각으로 공포에 떨어야했다.

 

세월은 흘러갔다. 1552년, 황태자 무스타파는 37세의 당당한 성인으로 영지 (오늘날 튀르키예콘야 지방)에서 뛰어난 통치력을 보이며 미래의 황제로 인정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슐레이만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던 그는 휘렘 소생의 동생들이 생기고, 어머니 마히데브란이 황제의 눈 밖에 나면서 힘든 세월을 보냈으나 백성들로부터 가장 인기있는 황태자였다.

마니사 총독을 거쳐 아마시야로 발령돼 근무하는 동안에도 무스타파는 백성들의 한 결같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바로 이점이 몰락의 원인이 됐다.

 

슐레이만의 아버지 셀림 1세는 그의 아버지 바예지드 2세에게 반기를 들고 두 번의 쿠데타 끝에 황위에 올랐다. 슐레이만은 '나 역시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노쇠해 져 갈수록 강박은 심해져 갔다.

 

휘렘은 그런 황제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군의 실력자 뤼스템 파샤와 모종의 공작을 꾸민 휘렘은 뤼스템을 시켜 무스타파에게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가 악전고투하고 있는 사파비 왕조와의 전장(戰場)에 합류하는게 좋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하지만 슐레이만에게는 무스타파가 황위(皇位)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

 

황제는 진노했다. 당장 무스타파를 소환했다.

무스타파의 측근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무스파타를 만류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명을 따랐다.

황제는 자신의 막사로 무스타파를 불러들였고 미리 기다리던 '처형자'들은 그의 목에 거침없이 밧줄을 걸었다.

무스타파는 반역자로 몰려 38세의 짧은 생을 접어야했다.

 

 

황제의 품안에서 사랑의 음유詩 들으며

 

이로써 휘렘의 라이벌들은 모두 몰락했다. 중년 이후 휘렘의 삶은 황후로, 미래에는 황제의 어머니로 제국의 영광과 권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만 하면 될 것같았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휘렘은 오십줄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기나긴 투쟁과 긴장, 극과 극을 달리는 성정(性情)이 그녀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갉아먹었던 것일까? 황제의 변함없는 사랑도 그녀의 병을 막을 수 없었다.

 

1558년 4월 15일 휘렘슐레이만이 전장에서, 황궁의 정원에서, 황홀한 침실에서 언제나 들려주었던 음유시(Gazel)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그 질풍노도의 삶을 놓았다.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내 가슴속 깊이 새겨진 그림 같은 나의 사랑, 나의 미소짓는 장미,

나의 행복의 근원, 내 안의 달콤함...머리카락은 아름답고, 눈썹은 활과 같고,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나를 아프게 하는 연인이여....그대의 문에서 계속 그대를 찬양하리, 그리고 노래하리. 사랑때문에 아픈 가슴을 지닌, 눈물이 가득 찬, 나는 무힙비요, 행복하도다." (ahncsik@naver.com 블로그의 번역 발췌) 

 

슐레이만 휘렘과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당시 황제들은 후궁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으면 더 이상 낳지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았거나 관계를 가져도 어떤 형태로든 임신이 안 되도록 했을 것이다.

아들들 중 누군가 황위를 물려받을 때 다른 형제를 죽이는 '형제살해법'이 있는 제국에서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아들끼리 살해하는 것만큼은 피하려는 의도였을까?

 

하지만 슐레이만휘렘으로부터 계속 아이들을 낳았고 이는 황제가 진작부터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오스만의  후계자는 휘렘의 태(胎)로 부터

 

이제 오스만투르크의 황위는 휘렘의 태(胎)에서 나온 누군가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됐다.

휘렘의 첫째 아들인 메흐메트는 1543년 스물 한살의 나이에 천연두로 죽었다.

휘렘이 낳은 첫 아들이라서 였을까?쉴레이만은 그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휘렘의 둘째 아들 압둘라는 일찍이 1526년 세 살 어린나이에 요절했다.

다섯째 아들 지한기르(1531~1553)는 장애아로 태어나 몸이 불편했는데 아버지 슐레이만이 이복형 무스타파를 죽인데 충격을 받아 정신병에 걸렸고 무스타파가 살해 당한 날로부터 한달 후 죽었다.

남은 이는 셋째 셀림 (1524~1574)과 넷째 바예지드(1525~1561)다. 그들은 슐레이만으로선 제6, 제7황자가 된다.

 

무스타파가 처형 당한 후 영지의 백성들은 황실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바예지드슐레이만의 명을 받아 반란을 평정했지만 슐레이만바예지드가 미적미적 거리며 마지 못해 진압했다고 의심했다.

 

그즈음 셀림바예지드는 서로 노른자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했다. 셀림은 아버지가 동생을 의심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1559년 바예지드를 공격했다. 형제의 내전은 콘야 전투에서 셀림의 승리로 끝났다.

바예지드는 적국(敵國)인 사파비 왕조로 망명했다. 사파비 왕조타흐마습 1세는 그를 환영했으나 슐레이만셀림은 그를 처형하지 않으면 엄청난 파국을 맛 볼 것이라고 으름짱을 놨다.

1561년 9월 25일 바예지드는 그의 아들 네 명과 함께 같은 날 적국의 수도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휘렘은 1558년 사망했기에, 사랑하는 아들(바예지드)과 네 명의 손자가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바라보는 비극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또 다른 아들(셀림)이 황위에 오르는 기쁨도 직접 누리지는 못했다.

 

슐레이만도 늙었다. 그는 휘렘이 죽은지 8년이 지난 1566년 5월, 헝가리 정복을 위해 자신의 13번째 원정을 떠났다.

근 20년 동안 지독한 통풍에 시달린데다 휘렘 사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극도로 쇠약해진 70대의 노(老)황제는 헝가리시게트바르 성(城) 함락 직전인 1566년 9월 5일 정오를 조금 지나 사망했다.

 

슐레이만은 영원한 사랑 휘렘과 나란히 묻히기를 소망했다.

부부는 나란히 안장돼 지금까지 튀르키예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한편, 이미 5년전 마지막 라이벌 바예지드를 물리쳐 놓은 휘렘의 셋째 아들 셀림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오스만투르크 11대 술탄(황제)에 오르게 된다.

1566년 9월 8일 대관식을 거행한 셀림은 할아버지 셀림1세와 구분된 셀림2세로 기록된다. 

 

셀림2세(재위: 1566년 9. 7~1574년. 12.15)는 '금발의 셀림' 또는 '주정뱅이 셀림'으로 불리었다.

어머니 휘렘을 닮아 금발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지독한 술꾼이자 오입쟁이로 오스만 황제 중 단 한번도 직접 군사원정을 나간 적이 없고 정사도 당시 부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일임하다시피했다.

다만 부재상이 워낙 유능했던 인물인지라 제국은 오히려 영토를 확장하는 등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셀림2세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찧고 어이없이 사망한 이후  무라트3세(12대)와 메흐메트3세(13대)를 거치며 제국은 서서히 기울어져갔고 이 시기부터 대항해 시대의 영광을 연 유럽으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린다.

 

어느 날, 타타르의 도적들이 동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저지른 노예사냥은 한 소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고, 노예소녀의 사랑과 야망은 16세기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국에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냈다.

역사의 나비효과는 그래서 재미있고 또 두렵다.

 

그밖의 이야기

 

 - 마히데브란은 아들 무스타파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 지방으로 쫒겨나 끼니도 거를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셀림2세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그녀가 죽을때까지 생활비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한다. 그녀는 셀림2세 사후 황위에 오른 무라트 3세의 치세까지 살았다.

죽은 후에는 아들 무스타파의 묘 옆에 묻혔다.

셀림2세 술꾼이었고 정치에는 무관심한 혼군(昏君)이었지만, 자신의 어머니 휘렘으로 인해 인생의 나락까지 간 가엾은 여인을 위해 온정을 베푼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 휘렘이 태어난 현 우크라이나의 로하틴 지방은 당시 폴란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두 나라는 각각 "휘렘은 우리의 조상"이라고 다툰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는 휘렘의 동상이 서 있고 1997년에는기념우표도 발행됐다.

 

-유럽의 일부 호사가들은 오스만투르크의 빛나는 투톱이 집권했다면 유럽이 과연 무사했겠느냐며 휘렘이야말로 유럽을 구한(?) 성녀라는 칭송 아닌 칭송을 내놓기도 한다.

휘렘의 권력욕과 강렬한 생존본능이 제국의 명재상 이브라힘과 장차 유능한 황제가 될 것으로 기대되던 무스타파 황태자를 제거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