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women in history

'아유타야의 丹心' 수리요타이 왕비...비단옷 떨치고 검을 들다

1547년 버마 따웅우 왕조와의 전쟁에서 왕비의 몸으로 전투 코끼리에 올라

사생결단의 죽음, 아유타야 軍 기사회생에 '골든타임'.... 멸망 직전의 조국 구해내

 

쓰라린 이별 뒤로 하고 왕자비 올라

 

“아무래도...네가...티엔 라차 왕자에게 시집을 가는 수 밖에 없겠다”
수리요타이는 아버지의 말씀이 예리한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버지 휘하의 장교 쿤피랍토라뎁과 남들은 다 아는데 둘만 모른다는 ‘남몰래 사랑’을 쌓아가고 있었다. 

 

딸의 연애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스리수렌도 그런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지만, 딸이 왕자의 배필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이런저런 것을 떠나 제왕의 청혼(請婚)을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스리수렌아유타야 왕국의 지방 영주였다. 얼마 전, 영지에 아유타야의 제왕 체타(라마티보디 2세)가 사냥 여행을 왔다. 왕은 사냥도 잘됐고 극진한 대접에 매우 흡족했다.

그는 기분 좋은 연회를 즐기면서도 아름답고 현숙해 보이는 한 소녀를 계속 주시했다.

 

사실, 왕은 전부터 스리수렌의 딸이 왕자비로 손색없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다. 마침(?) 이곳에 온 김에 수리요타이를 관찰하고, 마음에 들면 아예 청혼을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왕은 그렇게 했다.

 

수리요타이에게 쿤피랍토라뎁과의 이별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지만...제왕의 청혼을 거절한다?

어떤 일이 생길지는 자명하다.

늠름하고 다정하며 숨결마저 향기로운 사랑하는 연인.....하지만 이젠 영원한 이별이구나.

수리요타이는 그렇게 아유타야 왕국의 왕자비가 된다.

 

1529년 체타 (라마티보디 2세; 재위 1491~1529) 왕이 사망했다.

티엔 라차(수리요타이의 남편)의 큰형 아티타야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병약했던 아티타야는 몇 년이 못 가 병 져 누웠다. 그는 동생 차이라차를 불렀다.

 

착하고 어진 티엔 라차는 믿을 수 있다. 하지만 호전적이고 야심 찬 동생 차이라차는 위험한 놈이다! 
“약속해다오. 내가 죽어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충성을 다해 보필해 주겠노라고” 
“부처님 전에 맹세합니다” 차이라차는 그렇게 형을 안심시켰다.

 

'차이라차' 王에 충성 맹세..."일단은 엎드리자"

 

하지만 차이라차는 아티타야 왕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쿠데타를 일으켰다. “약하고 어린 왕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 버마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나라는 간신들이 들끓는다. 이대로 가면 아유타야는 망한다”
‘냉혹한 삼촌’은 왕이 돼야 할 어린 조카의 목을 베 죽이고 기존의 충신들도 대부분 없애거나 멀리 쫓아 보냈다.

그리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티엔 라차는 격분했다. 당장 한줌의 세력이라도 모아 차이라차를 응징하려했다. 하지만, 차이라차가 왕권을 장악한 원동력은 단지 그가 무력만 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쿠데타 명분으로 내건 ‘힘센 나라’ ‘간신 없는 궁정’論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널리 공감을 일으켰다. 또한 이미 새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수 많은 장수와 지방 영주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간 보는 자, 분개하지만 용기가 없는 자, 이참에 출세를 위해 재빠르게 변신한 놈들....뒤섞인 물감처럼 내 편 네 편이 불분명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그도, 수리요타이도 모르지 않았다.

 

차이라차의 말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강력한 자가 왕권을 쥐고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돌아가신 왕과 왕세자가 불쌍하지만, 우선은 새 왕이 아유타야를 어떻게 다스려 나가는지 지켜보도록 해요”

수리요타이는 남편을 설득했고 마침내 티엔 라차도 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여기서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고려 말에서 조선 영조 대인 1350년부터 1767년까지 존속한 타이족(族)의 나라 아유타야 왕국은 16세기 초였던 당시 버마제국, 베트남레(黎) 왕조, 크메르 제국(캄보디아) 등과 때로는 지배하고, 때로는 밟히면서 끝없는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1350년 라마티보티(1세) 왕이 세운 아유타야는 1438년 같은 타이족의 나라 수고타이를 완전히 병합, 마침내 타이족의 통일 왕국을 세웠다. 라마티보티 1세의 원래 이름은 우통로 이때(1350~1370)를 제1차 우통왕조라고도 한다. 1431년에는 강력한 이웃 앙코르와트를 일시 점령하는 등 맹위를 떨친 아유타야 왕조였으나 수리요타이가 새댁으로 왕궁에 들어갔던 당시 1500년대 초반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자(覇者)는 단연 버마였다.

 

진짜 무서운 적은 따로 있었네

 

한편, 피의 숙청을 통해 왕이 됐지만 차이라차는 나름대로 나라를 잘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호전성과 호색(好色)은 그를 결국 파국으로 몰고간다.
왕은 그즈음 수다찬이라는 매력적인 여성을 후궁으로 맞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다찬의 출신 가문이다. 수다찬아유타야 왕국의 창시자 라마디보티 1세(우통)와 같은 우통 가문의 여자였다. 우통 가문은 1408년 수판나품 가문에 왕위를 빼앗겼는데 바로 라마티보티2세, 아티타야, 차이라차 수판나품 가문이다. 신라에서 , , 씨 가문이 각축을 벌였던 것처럼 아유타야도 나라는 유지하되 지배 가문은 바뀌는 양상이 왕국의 종말까지 이어졌다.

 

차이라차는 호전적인 성격대로 버마 점령을 위해 전쟁준비에 몰두했고 마침내 대군을 전선으로 휘몰았다.

왕이 대규모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전선에 간 사이, 수다찬은 왕의 전속 악사(樂師) 스리텝과 눈이 맞았다.

 

왕이 밀림에서 싸우는 동안 수다찬은 은밀한 침실에서 스리텝과 뒹굴었다.

궁중사람들은 간부간부(奸夫奸婦)가 공공연히 동침해도 모르는 체 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 없이(?) 입방정을 떤 사람들의 목이 밀림이나 늪에서 썩은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차이라차 왕은 전장에 나가거나 지방 시찰을 다녀와 왕궁에 복귀하면 수다찬의 육체부터 탐닉할 정도로 그녀의 관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위에 오르고 2년 후에 아들 요드파가 태어났을 때 차이라차는 부처님의 축복이라며 크게 기뻐했지만, 사실 아이가 왕의 자식인지 수리텝의 씨인지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은밀한 뒷담화가 끊이지 않았다.

 

1546년 어느날, 왕은 수다찬이 타준 차를 마시고 몸에 난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몸부림 속에 죽어갔다.
수다찬은 섬뜩한 미소를 띤채 왕을 조롱했다.

 

우통 가문이 왜 너희 수판나품 가문에게 왕위를 내 줘야 해? 이제 나는 조상의 원한을 갚고, 다시 아유타야의 왕조를 우통 가문의 피로 이을거야....후후후”

수다찬의 간통 상대 수리텝이 바로 우통 가문이었던 것이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수리요타이수다찬 티엔 라차를 정조준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특하고 무서운 여자! 왕의 독살을 남편에게 뒤집어쓰게 해 아예 수판나품 왕가의 씨를 말리려한다"
수리요타이는 즉시 남편으로 하여금 머리를 밀고 절로 들어가게 했다.

 

티엔라차에게 왕의 독살 누명을 씌워 역모죄로 처단하려 했던 수다찬. 그러나 티엔 라차가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심한 건지, 수리요타이가 선제적으로 엎드려 싹싹 기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뭔가 찜찜하고 미심쩍은 가운데서도 수다찬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수다찬은 단지 “세상은 바뀌었다. 이제 이 나라의 실권이 누구 손에 있는지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수리요타이에게 으름장을 놓았을 뿐이다. 수리요타이는 세상 천진한 미소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가슴 속에 조용히 복수의 칼을 벼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요드파를 선왕 차이라차의 아이로 알고 있었으나 웬만한 궁중 사람들은 아이가 스리텝의 씨라고 생각했다. 수다찬은 아직 소년에 불과한 요드파를 왕위에 앉히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자들을 죽였다.

 

사람들의 목이 수 없이 떨어져 나간 탓에 주변에는 아부꾼과 공포에 질려 감히 찍소리도 못하는 인사들만 남은듯했다. 그렇게 되는데 1년이면 충분했다. (요드파 : 1535년생, 재위 1546~1547)

 

궁정에서 ‘이쯤이면 오염균을 박멸했다’ 고 판단한 수다찬요드파를 내리고 스리텝을 왕위에 앉혔다.
이 과정이 너무나 평온하고 별다른 저항도 없었기에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로써 아유타야 왕국은 수다찬의 계획대로 다시 우통 가문 혈통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길은 마침내 곧은 길로

 

한편, 수리요타이는 절에 숨어 권토중래하고 있는 남편과 은밀하게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수다찬스리텝은 선정(善政)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숙청과 학정, 수탈의 연속이었다.
백성들의 절규와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궁정의 신하들과 하인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새 왕의 변덕에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는 폭정자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아첨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어서, 수리요타이티엔 라차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쿠데타를 획책한다는 밀고가 수다찬에게 들어왔다.
 

수리요타이는 절로 사람을 보내 남편을 재빨리 피신시키고 본인과 가족도 모처로 숨어 사태를 주시했다.

하지만 숨어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수다찬의 감시망은 바작바작 조여오고 현상금에 눈먼 속물들은 이들을 찾으려 혈안이 돼 있다.

수다찬티엔라차 부부가 포박된 채 자신의 발 아래 던져졌을 때 어떤 말로 조롱해 줄까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보내고 었다.

 

수다찬과 스리텝이 아유타야를 다스린 지 반년 채 되지 않은 1547년의 어느 날이었다.

궁궐 외곽 경비부대로부터 '일단의 군사가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크게 놀란 수다찬스리텝은 높은 망대에 올랐다.

한눈에 봐도 군세가 엄정하고 기치도 정연한 강군(强軍)의 면모다.

“지방 영주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늠름한 자태로 코끼리 등 위에 앉아 반란군을 지휘하는 자는 바로.......수리요타이의 첫사랑 쿤피랍토라뎁!!

사실 수리요타이는 만약을 대비해 진작부터 쿤피랍토라뎁에게 전갈을 넣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대장군이 된 쿤피랍토라뎁수리요타이를 위해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

 

또한 수리요타이는 궁정 안팎의 믿을만한 인사들을 포섭해 혹시 모를 쿠데타 때 내부적으로 봉기해 줄 것을 종용했다. 수리요타이 부부가 그동안 보여준 자애로움과 덕은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반격의 토대가 됐다. 

수다찬의 공포정치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머리를 조아리고 굴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은 있었다.

 

수다찬은 재빨리 궁정수비대를 소집했지만, 어쩐지 이쪽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뿔사!!! 수리요타이는 온화한 미소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구나!

 

수다찬은 진작에 이들 부부를 도륙내지 못했던 것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은밀하고도 전광석화처럼 일어난 쿠데타는 별다른 살상없이 너무도 싱겹게 끝났다.

 

수다찬스립텝의 목은 메콩강에 지는 연꽃잎처럼 떨어지고 티엔라차는 그날에 바로 왕관을 썼다.

아유타야 왕국은 다시 수판나품 家의 차지가 됐고 수리요타이는 왕비에 오르게 됐다.

 

쿤피랍토라뎁은 아무 말도 없이 군사를 돌려 그날로 자신의 임지로 돌아갔다.

추억, 연민, 고마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뭉클한 감정이 담긴 수리요타이의 눈길을 그는 등뒤로 느꼈을까? 

 

전투코끼리에 올라 절체절명의 왕을 구하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수리요타이타이(태국) 역사속에서 기민한 판단으로 남편을 왕위에 올린 현명한 왕비 정도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애틋한 첫사랑과의 극적인 재회는 보너스랄까?

 

그녀가 타이 민족의 '꺼지지 않는 정신'으로 추앙받는 것은 이후의 행적에 기인한다. 어떤 인물이 후대사람들에게 '불멸'로 각인되는데는 흔히 헌신적이고 장렬한 마지막이 작동되는데, 수리요타이도 그랬다.

 

수리요타이가 왕비에 오른 바로 그해 ,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강자 버마(띠응우 王朝) 따빈슈웨티 대왕은 아유타야의 혼란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지긋지긋했던 아유타야의 선왕(先王) 차이라차에게 당했던 굴욕도 이참에 갚으리라며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버마 아유타야 20여 년간 암살, 쿠데타, 내전 등 국력소모로 피폐해져 있는 동안 포르투칼에서 신식 대포를 도입하고, 작은 수였지만 일종의 기관총이랄 수 있는 연사형 총포로 무장하는 등 탄탄한 전투역량을 구축해놓았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버마 군사를 아유타야는 막을 수 없었다.

먼 지방에 있는 쿤티랍토라뎁의 군사들이 오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수리요타이는 비단옷과 장신구를 벗어버리고 투구를 쓰고 검을 잡았다.

 

수리요타이는 왕비와 공주, 왕자들이 모두 참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불굴의 투혼 뿐인데, 우리 군사들에게서는 그것 조차 찾을 수 없다'

신하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왕자와 공주까지 데리고 코끼리에 올라 전선으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티엔라차 왕은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버마 장수의 사납고 거대한 코끼리가 압박하자 티엔라차의 코끼리는 겁을 먹고 등을 돌렸다. 이대로라면 곧 버마 장수의 긴창에 달린 낫이 왕의 목이나 허리를 유린할 것이다!

 

수리요타이는 자신이 탄 코끼리를 몰아 그들 사이로 진입했다. 왕비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생전 써본 적이 없던 창을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 사이 왕은 극적으로 탈출해 전열을 수습할 수있었다.

 

하지만 버마 장수의 눈에 자기 왕을 구하러 온 '상대 장수'의 코끼리 몰이는 뭔가 허술했고 창 놀림은 너무나 약하고 맥빠진 것이었다. 그의 무자비한 낫은 상대방의 허리를 여지없이 베고말았다.

 

왕비는 공주와 함께 전투 코끼리에서 떨어져 얼마 안 돼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짧은 운명의 시간 동안 정신을 가다듬은 티엔 라차 왕과 왕자들, 장수와 병사들이 버마의 지휘관을 맹공하기 시작했다. 버마 장수는 자신이 벤 장수가 여성이었으며 그것도 아유타야의 왕비였음을 알고 크게 놀랐다. 

 

아유타야軍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왕비와 공주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악에 받쳐 맹공을 퍼부었다.

목숨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덤벼드는 아유타야軍의 '미친 싸움'을 다 받아준다면 승리한다해도 피해가 너무 클 수 밖에 없다. 이번에야말로 아유타야를 완전히 병합하리라 다짐했던 따빈슈웨티도 어쩔수 없는 철군을 명했다.

 

왕비의 희생, 타이 민족혼의 정수(精髓)로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수리요타이 이야기는 워낙 잔가지가 많아 설(說) 또한 분분하다.

그녀가 코끼리 위에서 창을 휘둘러 적의 장수 몇 명을 일도참살(一刀斬殺)했다느니, 수리요타이가 직접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출정했다느니 하는 류(類)의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장수가 없기로 왕비를 총사령관으로 삼을리도 없었으려니와 곱게 자란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범같은 장수들을 무예로 물리쳤다는 말이 진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수리요타이의 단심(丹心) -나라와 왕실을 지키려는 그 옹골찬 정신-을 기리는 타이 민중의 정서에 이른바 '국뽕'이 더해져 신격화된 서사가 덫붙여졌다.

 

미얀마에서는 '적국의 왕비가 목숨까지 바치며 싸우는 모습에 감동한 '관대한' 따빈슈웨티가 통크게 철군의 결단을 내린 것' 이라는 한편, 타이에서는 '수리요타이의 죽음에 분발한 사생결단의 반격이 이뤄낸 승리'라고 해석한다.

 

수리요타이가 위대한 것은 오히려 그녀가 육체적으로 약했으며 군사적 훈련이나 지식이 없었음에도  전쟁터로 향한 결기 때문일 것이다. 

 

압도적인 무기와 하늘을 찌를듯한 사기로 뭉친 적군, 반드시 아유타야를 멸하리라는 버마왕의 의지에 눌려 싸우기 전부터 이미 기세가 반은 꺾여버린 아유타야의 군사들. 

 

수리요타이는 솔선수범만이 꺼져가는 아유타야 정신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몸을 던졌다.

 

수리요타이의 장례식은 아유타야의 백성의 눈물바다 속에서 거행됐다.

왕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 '체다 수리요타이'라는 거대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지금도 타이 차오프라야 강가에 조정된 '프라 체디 시 수리요타이'에 가면 전투코끼리를 타고 싸우는 왕비의 동상을 볼 수 있다.

 

그 후의 이야기

 

- 역사는 냉혹하다. 애국심과 정신력만 가지고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전투력이 비슷할 때 플러스 요인이 될 수는 있으나 최후의 승리는 역시 무기, 장비, 군사력으로 가름된다.

수리요타이의 희생은 아유타야 군의 가슴을 휘발시켜 일시적으로 적군을 물러나게 했지만 1564년 버마버인나웅 왕의 지휘아래 마침내 아유타야를 함락시켰다. 

 

이후 1569년 버마아유타야를 속국으로 삼아 마하 탐마라차티랏아유타야의 왕위에 앉히고 괴뢰통치했다.

 

하지만 아유타야에는 타이 민족 불멸의 영웅으로 불리는 나레쑤언 대왕이 등장한다. 그는 버마에서 7년간의 인질 생활을 한 후 천신만고 끝에 아유타야로 돌아와 힘을 길렀다. 이후 1590년 왕위에 올라 버마를 물리치고 란상, 란낭, 크메르 왕국을 점령해 아유타야인도차이나 반도의 최강자에 올린다. 

 

나레쑤언마하 탐마라차티랏 수리요타이의 딸 위쑤티 까싸트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 타이 역사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구하기는 쉽지않았다. 사건 연대도 한 두해 정도는 자료마다 다르고 왕의 이름도 어릴적 휘(諱)와 왕으로서 불린 이름이 달라 혼동하기 일쑤다. 예컨대 수리요타이의 남편 티엔 라차는 왕의 어릴적 이름 즉 휘(諱)이며 왕이 된후에는 차크라팟으로 불리었다. 시아버지인 체타라마티보티 2세로 명칭된다.

우리가 표기하는 그들 이름의 한글 표기는 비음과 성조가 강한 타이어의 특성상 현지 발음과 많이 다를 수 있다.

 

- 아유타야 제국은 1767년 보로마라차 9세미얀마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행방불명 되면서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타이의 역사는 탁신 왕조(15년 존속), 차크리 왕조(방콕 왕조)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현재 타이 국왕은 2016년 10월 13일 왕위에 오른 마하 와치랄롱꼰(Maha Vajiralongkor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