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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호조 마사코 (北条政子),여걸(女傑)을 넘어 영걸(英傑)....열도의 격랑을 잠재우다

12세기 일본 막부 정치를 연 초대 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내

가마쿠라 막부와 싯켄(執權) 정치 체제 확립에 지대한 영향 끼친 철의 여인

 

무모한 사랑, 싹수가 노란 내일

 

일본 도쿄(東京)요코하마(横浜) 인근의 이즈(伊豆) 반도.

지금이야 세계적인 인구밀집 지역이자 일본의 중심지지만 1100년대 당시에는 벽지 중의 오지로 사람 살 곳 못 되는 열도의 변방이었다. 이곳에 이즈국(國)이라는 작은 영지가 있었다.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는 당시 일본의 실세 헤이지(平) 가문을 섬기는 가신(家臣)으로 이곳을 다스렸다. 그는 안 그래도 이런 변방에서 썩어가는 게 원통할 따름인데 요즘 천방지축 ‘딸년’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천황과 상황(前천황) 간의 내전인 헤이지의 난(平治の亂; 1159년)에서 패전해 이곳에 유배 온 미나모토(源賴)가문의 요리토모(朝)라는 녀석과 딸 마사코가 은밀히 만난다는 소문이다.

도키마사요리토모를 감시해야 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여식(女息)이 유배 온 죄인과 연애를 하다니 절대 안 될 일이다’

 

도키마사이즈국의 하급관리 야마키 가네타카에게 마사코를 급히 시집보냈다. 도키마사는 이제 한 시름 놨다고 생각했지만....

 

마사코가 목침으로 새신랑의 뒷통수를 쳐 기절시키고 비바람 치는 밤을 달려 요리토모가 머물고 있는 깊은 산 속의 절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도키마사는 혹시 헤이 가문에 이 사실이 알려질까 봐 대놓고 딸을 찾거나 데려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코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178년, 요리토모마사코의 첫째딸 오오히메)

 

도키마사는 생각했다. “헤이지 가문이라고 영원하겠나? 언제 세상이 뒤집힐지 모른다. 지금은 몰락해 있지만 요리토모에게는 명문 미나모토 가문의 피가 흐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을 인정하고 사위 녀석을 지원하련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도키마사가 섬기는 헤이지가는 요리토모의 아버지와 두 형을 죽여 미나모토 집안을 몰락시켰다 (1160년). 따라서 헤이지 家와 미나모토家는 철천지 원수인데다 어쨌든 당시는 헤이지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헤이지家는 후에 마사코요리토모의 결혼을 알았지만 몰락한 집안의 거지같은 놈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며 방치하고 말았다. 더구나 헤이지家의 부하인 도키마사의 사위가 됐으니 무슨 말썽을 피우랴는 방심도 있었다.

 

기적같은 재기(再起).....가마쿠라 막부(幕府) 개창

 

숨죽이며 죽은 듯 살아온 요리토모에게도 기회가 온다. 1180년 천황가(家)의 유력자 모치히토미나모토 가문과 후지와라 가문의 용사들의 의기(義氣)를 들쑤셔 반란을 획책한다. 그는 정세 흐름으로 보아 자신이 천황에 등극할 가능성이 아예 없어졌다고 판단하고 내전을 일으켜 천황 자리에 오르려 했다.

 

헤이지가의 실력자 기요모리는 이를 미리 알고 모치히토와 그를 따르는 미나모토후지와라 연합군을 초토화하고 모치히토까지 죽음으로 몰았다.

 

이렇게되자 모치히토에게 가담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요리토모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단 300기의 병사들과 이리저리 떠도는 패잔병이 됐지만 전혀 예상밖의 일이 벌어진다. 헤이지 가문에 원한을 품은채 전국 각지에 숨어 미나모토 가문을 응원하던 수많은 무사들이 속속 요리토모의 수하로 들어온 것이다.

 

과거 요리토모의 할아버지 미나모토 다메요시(源爲義)는 전쟁에서 패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모든 땅을 부하들과 말단의 하급병사에게 나눠주고 죽었다. 그는 무사들 사이에서 의리의 화신으로, '멋진 주군'의 표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요리토모의 구심력은 사실 할아버지의 인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어난 수만기의 군사를 바탕으로 요리토모가마쿠라(鎌倉)에 진을 쳤는데, 마사코와 아버지 도키마사도 이때 정든 고향을 떠나 근거지를 가마쿠라로 옮겼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3년)의 근원이다.

막부(幕府)란 글자 그대로 '장군의 진영'이란 뜻으로 일본 무사정권 특유의 정치제제를 말한다.

 

이때부터 이른바 겐페이(原平) 전쟁으로 불리는 10년에 걸친 요리토모의 복수와 패권쟁패의 고단한 싸움이 시작된다. 미나모토(原)家는 헤이지(平)家와의 최종 싸움 단노우라( 壇の浦) 전투(1185년)에서 이겨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 장장 700년간의 막부 정권을 연다. 막부(幕府)는 일본발음으로 바쿠후라 읽는다.

 

 

1190년, 모든 라이벌을 물리친 요리토모는 1192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오른다.

우리발음으로 정이대장군, 즉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란 뜻으로 흔히 뒤의 '장군'만 따 '쇼군'이라 부른다.

이렇게 초대 쇼군을 배출한  일본 막부정치는 1868년 메이지유신까지 이어진다.

 

겐페이 전쟁사를 살펴보면 결국은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최종 승자라고 시나리오가 미리 짜여져 있는 것 같은 드라마틱과 이변의 연속이었다.

숱한 죽을 고비, 배신과 의기투합, 때마침(?) 발생한 서부 일본의 끔찍한 흉년으로 적군의 보급이 어려웠던 점, 천재적 무장인 이복동생 미나모토 요시쓰네(源義經)와의 극적인 해후 등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요리토모의 전쟁기(記)를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수백 명의 등장인물은 물론, 이야기 분량도 두툼한 단행본 한 권쯤은 넉넉히 될 테니 말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호조 마사코이기도 하고.

 

▲ 일본 막부(바쿠후) 체제 변천사

 

 

政子物語 - 냉혹과 배려의 이중성

 

요리토모의 전쟁기간 동안 마사코의 복합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몇가지 상징적인 사건들이 있다.

 

요리토모가 천운(天運)과 재능, 인재풀(pool)로 승리를 굳혀나가던 1182년 마사코는 훗날 요리토모에 이어 2대 쇼군(將軍)이 되는 요리이에를 낳았다.

 

그녀가 임신해 있는 동안 요리토모가메노 마에(龜の前)라는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

마사코는 남편의 애첩이 사는 집을 때려부수고 가메노 마에는 간신히 몸만 피해 어디론가 도망갔다. 마사코는 마에의 부모 등 그녀의 본가와 친척들에게까지 해꼬지를 하는 등 이 일로 주변은 쑥대밭이 됐다. 

 

요리토모는 격노했고, 아무리 달래도 길길이 날뛰는 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도키마사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가마쿠라에서 나와 고향 이즈반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요리토모가 펄쩍펄쩍 뛰어도 마사코는 눈하나 깜짝 안하고 오히려 더 성을 냈다. 요리토모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지 애첩에게 집을 제공한 히로쓰나라는 사람을 벽지로 유배시키며 마사코를 겨우 달랠 수 있었다. 

 

마사코가 둘째 아들 사네토모를 잉태했을 때 요리토모쓰보네라는 여자를 품었다. 쓰보네는 아들 죠코를 낳았는데, 아이가 7살이 됐을때 쓰보네죠코 모자는 돌연 출가를 하고 말았다. 마사코가 오죽 무서웠으면.

 

마사코는 자신의 남편 옆에 얼쩡대는 여인들은 용서치 않았지만 남들의 로맨스에는 관대했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의 일등공신 요시쓰네요리토모의 눈치를 보지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요리토모는 이를 몹시 불쾌해했고 결국 이런 갈등이 깊어져 요시쓰네는 모처로 도망치게 된다.

 

이때 요리토모요시쓰네를 따라가지 못한 그의 애첩 시즈카 고젠을 붙잡아 두었다. 

마사코는 평소 일본 전통 무용의 일종인 시라뵤시를 잘 추는 시즈카 고젠을 좋아했다.

 

마사코는 그녀에게 춤을 보여달라고 청했고 고젠은 마지못해 춤을 추면서도 요시쓰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를 들은 요리토모는 몹시 화가났다. 당장 시즈카 고젠에게 큰 벌을 내릴 태세였다.

 

이때 마사코요리토모에게 말했다. "당신이 유배를 와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싸움을 벌이고 있을때 내 심정이 딱 저 노래와 같았어요. 내가 고젠과 같은 입장이라도 나는 당신을 그리는 노래를 부를겁니다" 

요리토모는 아무말도 못하고 시즈카 고젠에게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시즈카 고젠은 후에 요시쓰네의 아들을 낳았는데 마사코가 극구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요리토모는 기어이 아이를 죽였다. 1189년 4월 요시쓰네도 결국 자결했다.

마사코시즈카 고젠을 가엽게 여겨 그녀가 교토로 돌아갈때 많은 재물을 챙겨주며 위로했다.  

 

요리토모는 박빙의 전쟁 양상에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심정으로 껄끄러운 상대와도 손을 잡았다. 

같은 미나모토 집안의 또 다른 실력자 요시나카가 그랬다. 요리모토요시나카는 일단 헤이지가문과의 전쟁에서 이기는것이 급선무라 손을 잡았다. 요리토모-마사코 부부의 첫째딸 오오히메요시나카의 아들 요시다카를 혼인시켜 서로 버거운 상대와 사돈을 맺은 것이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오오히메는 남편 요시다카를 깊이 사랑했다. 

 

그런데 사돈 요시나카가 스스로 쇼군(將軍)을 참칭하며 일본의 패권을 거머쥐려했다. 

고시라카와 상황(上皇)은 은밀히 요리토모에게 요시나카를 없앨 것을 종용했다.

요시토모는 천하의 맹장인 이복동생 요시쓰네노리요리를 시켜 요시나카를 격퇴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이제 사위가 원수가 된 것이다. 요리토모는 후환이 생길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 사위 요시다카를 죽이려 했다. 이를 미리 알아차린 오오히메가 남편을 재빨리 피신시켰다.

그러나 요시다카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결국 요리토모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오오히메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절규하고 또 절규했고 마사코는 "이제 우리 딸 어쩔거냐"며 요리토모를 닥달했다.

오오히메의 마음의 상처는 무거운 병이 돼 시름시름 앓다가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1197년)

 

스물 한 살 젊은 날, 미래도 불투명하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사내와 목숨을 건 도피행각 속에 잉태한 사랑의 결실이라서 였을까? 오오히메에 대한 마사코의 사랑은 각별했다.

딸의 죽자 자신도 따라죽으려 했을 정도로 말이다.


'비구니 쇼군 (比丘尼將軍)'

 

큰 딸이 죽은지 2년후인 1199년 1월 요리토모가 51세의 한창 나이에 낙마(落馬)사고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일본의 大영웅치고는 허탈한 죽음이었다. 비극은 잇달아 찾아왔다.

불과 5개월 뒤인 그해 6월 둘째딸 산만히메가 죽었다.

 

요리토모가 죽은후, 권력 주변 인물들 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1199년 2월 큰 아들 미나모토 요리이에 열여덟살 나이로 2대 쇼군에 오른다.

 

남편을 잃은 고관대작의 부인이 출가해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시 일본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마사코도 머리를 밀고 법복을 입었다. 비구니가 된 쇼군의 어머니는 이제부터 절간에서 조용히, 평온하게 지내다 생을 마치리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호조 마사코호조 마사코가 되는 시간은 이제부터다.

 

그녀는 절에 들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을 되내이며 어떤 다짐을 했을까?  

남편 요리토모가 죽고 사랑하는 두 딸은 먼저 보냈지만 그래도 큰 아들이 쇼군에 올랐으니 만족했을까?

 

하지만 미나모토 요리이에는 철없고 무능한 쇼군이었으며 가마쿠라 막부도 아직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이 마사코의 큰 근심이 됐다.

 

요리이에는 최측근 부하 아다치 가게모리의 애첩을 빼앗았다. 가게모리가 불평하자 요리이에는 적반하장으로 그를 역모로 몰아 죽이려고 군사를 보낸다. 이 소식을 들은 마사코는 급히 달려가 요리이에 앞에 섰다.

"이 무슨 짓인가? 가게모리같은 충신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냐? 그를 죽이려거든 내 목을 먼저 베고 가라"

 

요리이에는 주춤했다.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 더 무섭고 엄격했던 어머니.

이 순간은 어린시절 종아리 걷고 회초리를 든 어미 앞에 선 어린아이였다.

마사코 덕에 가게모리는 목숨을 구했다. 마사코는 인재를 알아봤고 그 인재가 내 편이면 최상의 대우를, 적이라면 일찌감치 제거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후 요리이에는 사춘기 소년처럼 매사에 삐딱했다.

이런저런 잡기에 심취해 있었을 뿐 아니라, 정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마사코는 이때 중대한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저 녀석에게 막부를 맡겨서는 안된다. 어떻게 이룩한 아성(牙城)인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어.....

내가 나서는 수 밖에'

 

마사코는 절간에 들어앉아 있었어도 들을건 다 듣고 볼 건 다 보고 있었다. 

마사코는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와 남동생 호조 요시토키의 정치적 입지를 조정해 사실상 자신이 정국을 이끌었다. 일본 역사에서 그 유명한 '비구니 쇼군(比丘尼將軍)'이라는 명칭은 그렇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자식도 제치고 아비도 보내고....권력 굳히기

 

이러자 요리이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처가인 히키 가문과 손잡고 어머니와 외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요리이에의 장인(丈人) 히키 요시카즈도 만만치않은 인물이어서 술수에 능했다. 그는 요리이에를 꾀어 막부의 요직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한편 요리토모 시절부터의 충신 가게토키를 몰아내고 집안까지 도륙했다.

앞으로 요리이에히키 가문이 전횡을 휘두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마사코는 아들이 처가에 휘둘리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원로 신하들을 규합해 그들에게 '권력'을 실어줬다. 드라마나 영화 등 일본 사극에서 자주 조명되는 이른바 '13인 합의제'를 편성해 쇼군 1인 통치를 금하고 집단지도제같은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13인 중에는 호조 도키마사, 호조 요시토키(마사코의 남동생) 등 호조 가문의 사람들과 오오에노 히로모토, 가지와라 가게도키같은 선대부터의 충신들이 있었는데 눈여겨 볼것은 쇼군 요리이에의 장인 히키 요시카즈도 선임했다는 점이다. 강력한 적을 '우리 편'의 내부에 섞어 넣음으로써 오히려 상대편의 운신의 폭을 제한한 것이다.

 

요리이에의 주색잡기는 쉼이 없었고 축국같은 과격한 운동을 지나치다 싶도록 했다. 

1203년 어느날 이제 23세에 불과했던 요리이에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기회를 노리며 눈을 번뜩이는 자들이 많았다. 

 

마사코는 도키마사와의 긴 독대를 가진 후, 이미 산송장인 요리이에를 쇼군에서 끌어내리고 일본의 반은 요리이에의 아들 이치만이, 나머지 반은 마사코의 둘째아들 사네토모가 다스리는 안(案)을 전격 발표한다.

 

히키 요시카즈는 병상의 요리이에를 부추겼다. 호조 가문이 쇼군을 능멸하고 일본을 제멋대로 주무르려하니 빨리 토벌하라는 말이었다. 요리이에-히카 연합군이 거병을 준비하는 사이, 마사코가 한발 더 빨리 움직였다.

마사코와 호조 도키마사는 번개같이 군사를 보내 히카 요시카즈를 토벌하고 이치만까지 죽였다.

 

히카 가문의 멸망이야 그렇다쳐도 이치만마사코의 손자이자 도키마사의 외증손자다.

훗날 사람들이 마사코의 비정함에 혀를 내두르고 그녀를 일본의 3대 악녀로 꼽는 이유다.

그러나 마사코는 멈추지 않았다. 손자까지 죽였는데 뭐가 두려울까? 골육상잔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호조 가문, 일본을 손에 쥐다

 

1204년 유폐된 요리이에가 배후가 밝혀지지않은 암살을 당했다.

마사코의 둘째 아들 사네토모가 12살 나이에 3대 쇼군에 올랐다. 

마사코 장래 분쟁의 불씨를 제거하는 차원에서 요리이에의 아이들을 강제로 출가시켰다.

 

마사코는 호조 도키마사를 초대 싯켄(執權)에 올렸다. 일본 역사의 새로운 체제요 또 하나의 최초다. 

싯켄의 권한은 이름 그대로 '집권'

쇼군 의 모든 정무를 대신하는 자리, 그야말로 실세요 권력의 정점이다.

 

이로써 모든 권력은 사실상 호조 가문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호조 도키마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

 

도키마사와 그의 후처 마키 노가타가 사위 히라가 모모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하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마사코 귀에 들렸다. 당시 사네토모도키마사의 집에 머물고 있었기에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사코는 재빨리 사네토모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남동생 호조 요시토키와 군사를 동원해 아버지를 체포했다. 도키마사는 즉시 싯켄 자리에서 축출됐고 후처와 함께 절에 감금됐다.

자식도 손주도 죽인 마사코지만 아버지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호조 요시토키는 아버지 뒤를 이어 2대 싯켄에 올랐다.

 

이즈음 쇼군 미나모토 사네토모는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얽었다. 소심한 그는 자기 모습을 부끄럽게 여겨 정무에도 나오지 않고 외부활동도 극도로 꺼렸다.

그는 히키코모리처럼 틀어박혀 와카(和歌; 일본 전통 문학장르로 우리의 시조같은 장르)를 쓰는데 몰두했다.

급기야 이런저련 병에 자주 노출되며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자식 넷을 다 보냈구나"

 

마사코의 고민도 커졌다.

'사네토모는 후손이 없다. 후계자는 누구로 하지? 아냐 아냐 어떻게든 사네토모의 병을 낫게 해야한다'

마사코사네토모에게 외부행사에 자주 참여하며 건강을 회복할 것을 권면했다.

이 즈음 마침 천황이 사네토모에게 우대신(右大臣) 직책을 내린 터라, 그는 기분좋게 하치만 궁(宮)에서 열리는 의식에 참가했다.

 

사네토모가 막 천황의 임명장을 받아들던 순간, 전혀 예상 못했던 돌발상황이 벌어진다. 

도열해 있던 한 승려가 칼을 빼들고 사네토모에게 달려들어 그의 가슴 깊이 칼을 박아버린 것이다.

누가 미처 말릴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네토모는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범인의 얼굴을 본 마사코와 참석자들은 경약했다.

그는 요리이에의 둘째아들 구교였다. 구교는 아들을 죽이고 손주인 자신들을 강제로 출가시킨 할머니 마사코와 삼촌 사네토모에게 복수한 것이다. 아니, 외가인 호조 가문에 복수했다고나 할까?  

현장에서 잡힌 구교는 처형됐다. 그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마사코는 기가 막혔다. 

 

'어린 두딸을 먼저 보냈는데 이제는 핏줄이 핏줄을 죽이고 가족이 가족에게 복수하는구나.

아들 둘이 다 죽고 손주까지 내 손으로 처형해야 하다니'

 

 

천황가의 반격......최대 위기에 직면하다

 

사네토모는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강제 출가시킨 요리이에의 아들들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구교의 예에서 보듯 그 녀석들도 호조 가문에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차기 쇼군을 요리이에의 핏줄로 잇는다는 것은 호조 가문의 멸절을 부를지도 모른다.

 

마사코는 어쩔 수 없이 고토바 상황에게 황자를 쇼군으로 옹립하자고 의견을 냈다.

고토바 상황은 일단 거절했다가 나중에 자기 애첩이 가진 땅의 세금징수관을 파면시키면 응하겠노라는 조건을 걸었다. 깐깐한 세금징수관을 쫒아내 사실상 세금을 감면받자는 수작이었다.

 

마사코의 일처리는 깔끔하고 공정했다. 그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세권을 흐리는 것은국가의 재정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상황의 제안을 일축했다.

이 일을 계기로 상황과 마사코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길을 걷게된다.

 

마사코는 궁리 끝에 요리토모의 먼 친척인 미토라를 4대 쇼군으로 세운다.

당시 두 살에 불과했으므로 마사코가 수렴청정으로 정국을 이끌었다. 

미토라는 후에 후지와라 요리쓰네로 불리게 되는데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은 미나코토 가문에서 후지와라 가문으로 옮기게 됐다.

 

고토바 상황은 약이 오를대로 올랐다.

1221년, 그는 전국의 영주와 무사에게 은밀히 명을 내려 싯켄 요시토키 토벌을 명한다.

사실상 마사코가마쿠라 막부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국가운영의 실권은 막부와 싯켄에 있다해도 천황가에 대한 무사들의 경외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국 영지의 장수와 무사들이 술렁술렁거렸다. 이참에 가마쿠라 막부를 엎어버리자는 성토도 나왔다.

막부의 장수들까지 동요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마사코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천황가와 막부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교토(京都) 토벌...."권력은 막부(幕府)의 것"

 

이때, 일본 판세를 단숨에 바꿔버리는 마사코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그녀는 가신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한다. 험한 세월동안 단련된 내면의 힘이 응축된 당찬 외침이었다.

 

"그대들은 왜 동요하는가? 그대들의 주군이  요리토모임을 잊었단 말인가?

주군에게 받은 은혜가 산보다 낮은가? 바다보다 얕은가?  

 

간신들의 꾐에 넘어간 상황이 몽매한 명령을 내려 가마쿠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리토모를 주인이라하는 그대들이 참 무사라면 어서 적들을 쳐야 마땅치 않은가?

교토의 적들을 쓸어버리고 3대에 걸친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라.

단....상황에게 가고자 하는 자는 지금 떠나라. 지금 가면 베지 않겠다"

 

마사코의 웅변이 끝나자 동요하던 가신들이 한 목소리로 충성을 맹세하고 눈물을 흘렸다고하니 그 위엄과 울림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막부의 19만 대군은 즉시 교토로 쳐들어가 상황을 쫒아내고 간단히 적군을 평정했다.

고토바 상황은 차마 죽일수 없어 오키섬으로 유배보낸다.

 

이 사건으로 막부는 천황가와의 세력다툼에서 확실하고 견고한 우위를 확보했다.

이를 죠큐의 난(承久の亂; 1221년)이라한다.

 

1224년 싯켄 호조 요시토키가 사망한다.  또다시 권력의 공백을 기웃거리는 자들이 나타난다.

요시토키의 후실이 음모를 꾸며 자신들의 혈육과 사위를 각각 쇼군과 싯켄에 올리려는 반란을 꾀했다.

 

마사코의 정보력은 탁월했다. 가신들을 움직여 이들을 바로 응징하고 요시토키의 큰아들 야스토키싯켄에 옹립했다. 물론 반역을 꾀한 이들은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 응징했다. 

 

천년 역사의 줄기를 틀다

 

질풍노도로 달려온 여인의 일생....마사코도 늙었다.

1225년 마사코는 69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호조 마사코와 그녀의 가족은 단노우라 전투(1185년)로 쇼군의 천하를 세우고, 싯켄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정립했으며,  4대 쇼군으로 미토라를 옹립함으로써 후지와라 막부시대를 열었다.

죠큐의 난(1221년)으로 천황가를 제압하고 일본의 주인은 막부라는 것을 못박았다.

 

마사코의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권력'인지도 모른다.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자식과 손주를 죽이고 아버지도 내쳤기에 일본의 3대 악녀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가 자신과 가문의 생존을 위해 뛰어든 모든 싸움은 그러나 막부시대라는 안정기를 가져와 오랜 전란에 지친 열도에 평화를 가져왔다. 

 

비바람 몰아치는 칠흑같은 밤. 짐승이 울어대는 산길을 뚫고 정인(情人)을 향해 뛴 스무살의 마사코!

그 때 '선머슴 처녀'의 달음박질은 일본의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천년 역사에 거대한 발자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