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women in history

古代 팔미라 '제노비아' 女王, 섬광처럼 빛나고 연기처럼 지다

당대 최강 로마제국에 맞서 고대 시리아, 아라비아, 아나톨리아, 이집트 정벌

조국 팔미라를 제국의 반열에 올린 시리아의 '국민영웅'

 

제노비아는 서기 260년부터 273년까지 고대국가 팔미라의 왕비였고 태후였으며 후에는 여제(女帝) 지위에 올라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에서 가나안 , 아라비아 반도 동남부, 이집트까지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여장부다. 

 

놀라운 것은 당대 최강의 제국 로마의 속주(屬州)들을 공격해 팔미라의 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을 아우구스타(Augusta) 자칭, 한자문화권에 비유하면 '칭제건원' 하면서 지중해 세계에 팔미라의 자존을 선포했다는 점이다. 시리아 국민이 '우리들의 영원한 여왕님'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노비아 이야기다.

 

"구릿빛 피부, 진주처럼 하얀 치아, 반짝반짝 빛나는 검고 커다란 눈,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여인, 그렇지만 힘은 강했는데 껴안고 싶은 여성스러움이 있어 아마도 오리엔트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이 아닐까?"라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기록으로 유추해 보건대 제노비아는 오목조목 예쁜 스타일이라기보다 건장하고 잘생긴 유니섹스적 매력을 가졌던 것 같다.

 

제노비아의 출신과 부모에 대해 조상 대대로 팔미라 지역에서 통상을 통해 부를 축적해 온 사막 호족의 딸로 어머니는 이집트 여성이라는 설이 있고, 아버지가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인물인데 이름을 율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제노비우스(Julius Aurelius Zenobius)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기록도 있다.

 

제노비아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가정에서 컸다. 딸이라는 차별을 받지않고 로마어는 물론 고향인 시리아(당시 팔미라)·이집트·라틴·그리스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낙타와 말을 잘 다루고 사냥도 즐긴 전방위적 스펙을 갖춘 여성이었다. 

지적 · 신체적 능력이 웬만한 로마귀족남성에 못지 않았다.

 

당시 팔미라의 영주였던 오데나투스(?~267)는 제노비아라는 매력적인 소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부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 미소녀가 낙타를 몰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현란할 정도라는 것이다.

 

"미인인데다 기마술까지?" 호기심이 발동한 오데나투스는 수행을 대동하고 사막으로 말을 몰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저 멀리서 모래먼지를 날리며 낙타를 몰고 달려오는 한 소녀가 있다.

 

오데나투스 일행 앞에서 멈춘 소녀가 낙타에서 내려 얼굴에 두른 두건을 벗는데......."아!!!!" 

 

비너스? 데릴라? 이집트의 절대미모였다는 클레오파트라?

소녀는 사막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같았다. 한눈에 반한 오데나투스!

 

그 만남으로 제노비아의 인생은 사막의 지평선을 물들이는 석양처럼 황금빛으로 찬연해진다.

 

제노비아는 15살 무렵인 서기 255년 오데나투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그녀는 바발라투스, 하이란 2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 등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당시 팔미라로마제국의 속국이었다. 로마팔미라에 비교적 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아마도 동방의 무서운 적 사산제국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에 대한 일종의 인센티브였을 것이다.

 

팔미라는 로마제국의 오랜 지배 속에 정치제도 · 문화 · 건축 · 도량형 · 세법 등 로마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우리는 로마시민일지언정 로마 혈족은 아니라는 자존감은 확실했던 것 같다.

오데나투스는 늘 "우리는 로마인이 아냐. 우리의 신(神), 조상, 언어, 관습은 그들과 달라. 언젠가 저들을 몰아내고 팔미라만의 왕국을 세울테다"라고 되내었다.

 

강철제국이라 해도 조금만 녹이 슬고 빈틈이 보이면 지배받는 민족은 어떻게든 고개를 들고 일어서려 한다.

유럽소아시아, 북부 아프리카를 제패하며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쓰던 대제국 로마는 2세기 말부터 서서히 쇠망기에 접어든다. 팔미라 힘이 빠져가는 로마를 관망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서기 260년 로마는 건국 이래 유래가 없는 대망신을 당한다.

로마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샤한샤 샤푸르 1세와 에데사 평원에서 맞붙어 패하고 급기야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한 것이다. 

흉흉한 이야기들이 로마에 전해졌다.

 

"황제가 7만 명이나되는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지만 전염병이 돌아 패퇴했다"

"궁지에 몰린 황제가 돈을 준비해 휴전을 구걸하려고 샤푸르 1세를 만나러 갔지만 그들에게 속아 포로가 됐다"

"배고픔에 눈이 돈 병사들이 황제를 생포해 적에게 넘기려고 하자 발레리아누스는 자존심도 버리고 스스로 투항했다" 

 

로마시민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언제까지나 탄탄한 반석이라 믿었던 로마도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하는 '현타'가 찾아왔다. 

갈리에누스((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18년경~268년; 재위 260~268)가 포로가 된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즉각 황제에 올랐다.

 

갈리에누스 시대의 로마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했다.

서쪽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가 반란을 일으켜 반(半)독립상태에 이르렀고 고트족은 수시로 국경을 넘봤다.

다키아, 트라키아도 주기적으로 소동을 일으켰다.

 

오데나투스는 로마의 혼란을 영악하게 이용했다.

그는 로마군 동방기병대 사령관 소(小)마크리아누스와 손을 잡고 사산제국(페르시아)과 싸웠다.

뛰어난 전투력으로 샤푸르 1세가 차지한 오리엔트 지역을 야금야금 복구해 다시 로마의 영토로 돌려놓았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데나투스의 전과를 극찬하며 그를 팔레스타인소아시아, 시리아 일대를 지키는 동방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한편, 오데나투스와 연합군을 이뤄 사산제국에 복수한 소(小)마크리아누스는 로마시민들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 신화 속 영웅같은 인기를 얻게된다.

팔미라인들은 오데나투스를, 로마시민들은 소(小)마크리아누스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오데나투스가 다스리는 팔미라는 이미 로마의 한 지역을 넘어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아내 제노비아가 왕비, 태후, 여왕의 칭호를 받게되는 이유다.

 

소(小)마크리아누스는 동방출정군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로마시민의 신뢰를 등에 업고 로마의 동방(팔미라 지역을 포함한)에서 황제를 칭하며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이렇게 되면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오데나투스가 실질적인 팔미라의 왕인데 소(小)마크리아누스는 이 지역에서 황제를 선포한다?

오데나투스는 동맹군 사령관이 자기 영역에서 황제를 칭하므로 입장이 모호했을테지만 일단 추이를 지켜봤다. 

 

두 영웅의 비상(飛上)은 놀라웠으나 추락(墜落)도 급작스러웠다.

261년, 소(小)마크리아누스갈리에누스 황제를 내리고 자신이 로마 전체의 황제가 되기 위해 본토로 진군했다.

 

소(小)마크리아누스는 의기양양하게 출전했으나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예상밖의 처참한 패배를 맛본다.

오데나투스는 로마제국의 내전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기회가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전쟁에 진 마크리아누스 부자(父子)는 처형됐다. 동방의 황제로 인정받던 소(小)마크리아누스가 죽었으니 오데나투스의 입지가 강화될 것은 뻔하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데나투스를 한껏 띄워주며 소(小)마크리아누스의 동생 퀴에투스를 죽일것을 명한다. 퀴에투스는 직전까지 형과 동맹관계였던 오데나투스에 쫒겨 에메사 지방으로 도망갔다가 현지 주민들에게 살해당한다. 

 

갈리에누스는 동방까지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황제는 오데나투스를 동방사령관에 임명해 사산제국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방어하도록 했다. 오데나투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갈리에누스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어 마침내 반독립상태인 팔미라의 황제로 추인받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황비다...." 제노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로마는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황제를 칭하며 "로마는 내 것"임을 떠들고 다니는 이가 20명에 이르렀다.

프랑크族, 알레마니族, 고트族 등 로마가 야만으로 여기던 사방의 족속들이 들고 일어났다.

 

'로마는 우리 팔미라를 간섭할 겨를도, 힘도 없어. 갈수록 약해질 거야. 더 큰 힘을 축적해 영토를 늘려 나가야한다' 오데나투스를 무색케하는 야심과 배짱을 지닌 제노비아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제 오데나투스는 무서운 게 없고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마치 자신이 옛 마케도니아의 제왕 알렉산더라도 되는 양 우쭐했다. 로마까지 우습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정점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된다.

 

267년, 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오데나투스는 성대한 승전축하 연회를 열었다. 

흥겨운 음악과 무희의 관능적인 춤이 분위기를 고조하는 가운데 축배를 들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병사들의 용맹을  칭찬하던 오데나투스가 갑자기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조카 메오니우스가 혼란한 틈을 타 왕을 찌르고 왕이 첫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하이란 1세까지 해치웠다.

 

시종들이 피투성이가 된 황제와 아들을 수습하는 사이,  제노비아는 즉시 메오니우스를 잡아 현장에서 처형했다.

메오니우스는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예전, 오데나투스가 사냥할 때 점찍어 놓은 짐승을 메오니우스가 먼저 창을 던져 죽였다. 여기 격분한 오데나투스메오니우스를 쇠사슬에 묶어 놓고 망신을 줬다. 이에 앙심을 품고 증오를 키운 메오니우스가 일을 저질렀다는 설이 있다. 

 

또는,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가 몸집이 커지는 팔미라를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제노비아메오니우스가 결탁해 오데나투스와  왕위 계승 1순위인 전처의 아들 하이란1세를 동시에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제노비아의 아들 바발라투스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후자일 결우, 제노비아오데나투스 부자(父子)를 한꺼번에 죽여준 고마운(?) 동업자를 재빨리 토사구팽한 셈이다.

 

제노비아는 황후의 권한으로 자신의 아들 바발라투스를 황제에 등극시킨다. 그리고 공동통치자로 팔미라 제국을 통치한다.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제노비아를 역사의 전면으로 내몰았다.

 

"클레오파트라를 숭배하느냐? 옛 이집트 여왕을 흠모하느냐? 나야말로 이집트의 여왕이요, 칼과 활을 들고 싸우는 '전사 여왕'임을 잊지 말아라" 제노비아는 자신을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으로 여겼고 백성들에게도 주지시켰다.

 

270년, 자기확신과 야심으로 똘똘 뭉친 제노비아는 마침내 팔미라로마 속주가 아닌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로마가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에서 고트족과 싸우느라 쩔쩔매는 사이, 제노비아이집트시리아 속주를 점령했다. 다음해인 271년에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현 튀르키에)와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까지 점령하면서 순식간에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오데나투스의 사후, 3~4년의 짧은 기간에 이룬 혁혁한 성과는 명장(名將) 자브디스의 활약이 눈에 띄지만 제노비아의 군사적 역량과 작전능력도 뛰어났다.

 

제노비아는 순식간에 엄청난 업적을 성취해 냈다. 그래서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다른 관점에서 살피게 된다.

그러니까 오데나투스소(小)마크리아누스와의 연대를 가차없이 깨버리고 팔미라 왕의 위치를 확고히 했던 것, 로마황제 갈리에누스를 압박해 기어이 팔미라의 자치를 관철하고 '동방 황제' 칭호를 받아낸 일에도 분명히 제노비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제노비아는 급기야 자신을 아우구스타(Augusta)라 자칭하며 로마황제나 황후에 버금가는 존재임을 과시했다.

"내가 곧 황제"라는 말과 같았다.

 

팔미라에서 유통하는 동전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문화사업과 이민족 정책도 잘 해나갔다. 당시 팔미라 지역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은 대형 석조 건축물이 많았다. 그중에도 팔미라 궁정은 단연 압권이었는데 제노비아는 이곳을 철학자와 과학자를 위한 연구공간으로 제공해 학문 부흥에 힘썼다.

 

당시 사산제국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이집트에서는 태양신 '라' 신앙, 가나안 땅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유대교가 성행했고 로마의 신앙은 유피테르(제우스)를 정점으로하는 다신교였다. 서기 270년 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 수 십 년전으로 제국에서 기독교를 탄압할 때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기독교던 유대교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용인하며 그들에게 내재된 에너지, 즉 그들의 부(富)와 문화역량, 노동력 등 맨파워를 제국의 활력소로 활용했다.

 

"제노비아라는 여인.....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되겠어. 이집트,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먹더니 이제는 드라키아까지 기웃거릴 태세아닌가?"

서기 270년 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아우렐리아누스는 취임 일성으로 팔미라 문제를 언급했다.

 

로마는 지난 10년동안 레리아누스 (260년 포로가 됨), 갈리에누스 (공동통치후 260~268), 고티쿠스(268~270)등 황제 세 명이 바뀌는 등 그 동안의 혼란상이 고스란히 정치난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56세의 원숙함을 자랑하는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제로 들어서자 다시 로마다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만에 '로마인의 혼을 가진 황제'라는 평을 들을 만큼 공격적이고 즉각적인 행동의 소유자였다.

 

원로원의 돈줄 동화(銅貨) 주조권을 빼앗고, 관리가 어려운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몰도바 지역) 지방을 고트족에게 넘기는 등 버릴건 버리고 취할건 취하는 실리적인 판단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무력으로 황위에 오른 그는 로마 본토로 쳐들어 온 반달족을 격파, 전멸시키고 알레만니 족을 무찌른 후 고트족까지 격퇴하며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전쟁 중에도 군사조련과 군수물 비축에 심혈을 기울이더니 마침내 서기 272년 전격적인 팔미라 정벌을 단행한다.

 

아우렐리아누스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해 팔미라로 향했다.

아우렐리아누스 체제의 로마는 더 이상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밟히는 '덩치 큰 약골'이 아니었다.

사납고 날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며 다져진 전투력에 탄탄하게 구축된 작전능력을 갖추고 체계적인 군수수송 시스템을 장착했다.

 

가장 큰 힘은 지난 70년간 약화 일로를 걷다 급기야 황제가 적의 포로가 되는 굴욕까지 겪으며 깨달은 시민들의 '자각'이었다. 우리도 정신차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패배자가 될 수있다는.....

로마를 로마제국으로 성장케한 본연의 엔진, 바로 로마인들의 총화(總和)가 단단하고 날카로운 창이 돼 팔미라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을 지나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넌 로마군은 안티오케이아 (현 튀르키예 안타키아)와 에메사(현 시리아 홈스)에서 팔미라 군을 연파했다. 

 

 

파죽지세로 치달은 로마군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수도 팔미라 성을 포위했다.

지루한 공격과 수비가 이어지는 동안 해가 바뀌었다.

제노비아는 고심에 고심을 더했다. 이곳에서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느냐, 일단 탈출해 후일을 도모하느냐....

 

제노비아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바발라투스와 탈출을 시도했다.

로마군은 완벽한 프레싱으로 이들 모자가 팔미라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이듬해인 273년 팔미라 성이 함락됐다. 로마는 팔미라에 관대한 정책을 펴 약탈과 살육을 금했지만, 팔미라인들이 틈만나면 폭동을 일으키고 반항하자, 참다 못한 황제는 로마군에게 팔미라 백성에 대한 참교육(?)을 명했다.

 

건물이 불타고, 재산을 빼앗겼으며, 남자들이 도륙되고, 여인들이 능욕을 당했다. 팔미라성은 폐허가 됐다.

 

 

행방이 묘연하던 제노비아 소식이 들린것은 274년이다.

그해 로마에서 열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개선식에 제노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마차 뒤에 결박돼 끌려다니며 로마시민들의 조롱과 구경거리로 전락한 팔미라 여왕의 모습은 '로만(Roman) 카니발'의 하일라이트였다.

 

그리고, 이후의 기록은 -아직까지는-발견되지 않았다.

"굽히지 않고 자비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자존심을 지키다가 로마식 형벌로 처형됐다"

"무슨 소리, 그 미모에 죽임을 당할리가.....원로원 귀족과 재혼 해 티부르(현 이탈리아 티볼리)의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다더라"

"수치심에 못이겨 자결했다던데?"

 

상상, 억측, 미화(美化), 폄훼의 각종 설이 난무하며 1800년이 흘렀다.

 

시리아 국민들은 '자존을 지킨 빛나는 영혼, 로마의 폭정에 맞서 싸운 위대한 여전사, 민족 투쟁의 횃불'로 받들며 그녀의 초개같은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리아에서는 제노비아 얼굴이 들어간 지폐가 통용되고 있다.

 

혹자들은 그녀보다 먼 옛날 로마에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고대 잉글랜드의 여장부 부디카에 투영하기도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1737~ 1794; 영국)은 그녀에 대해 "고대 이집트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한다. 러시아제국의 여왕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을 제노비아에 비유하길 좋아했다.

 

제노비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굽힐줄 모르는 불굴의 전사? 권력욕의 화신? 냉혹한 기회주의자? 찬연히 빛나다가 허무하게 꺼져버린 고대 오리엔트 역사의 한줄기 섬광?

 

후인(後人)들은 그저 상상의 나래만 펼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