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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비잔틴의 '테오도라'.... 황제는 제국을 일으키고 그녀는 황제를 지배했네

테오도라 (500년? – 548년 6월 28일)

전차경기장(히포드롬)의 무희에서 비잔틴 제국 황후에 오른, 신분 상승 스토리의 끝판왕

비잔틴 제국의 명군 유스타니아누스의 아내.....니카 반란의 응어리로 냉혹한 악녀로 묘사되기도

테오도라에 대한 황제의 변함없고 깊은 사랑, 제국의 기념물 곳곳에 흔적

고대 서방의 정수(挺秀) 로마의 영광을 이어받아 오리엔트에서 꽃을 피운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
비잔티움 양식의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제패하며 부를 거머쥔 6세기 비잔틴제국에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 있으니 바로 테오도라(Θεοδώρα)다. 그는 비천한 댄서 신분에서 황후까지 오른 희귀한 인물로 신데렐라는 명함도 못 내밀 신분 수직 상승의 끝판왕이다.
 

테오도라의 성공스토리는 행운으로만 돌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재기발랄한 탤런트에, 신비스럽기까지 했다는 미모, 그리고 일당백의 용사 같은 배짱이었다.

비잔틴제국의 황후 테오도라 (500년? – 548년 6월 28일)이야기다.

 

‘오늘도 틀림없이 올 거야. 그는 내게 반했거든’
테오도라는 춤을 추면서 관객석을 훑어봤다. 젊고 잘생긴 원로원 의원 유스타니아누스는 요즘 하루가 멀다고 이곳 전차 경기장을 찾았다.

 

콘스탄티노플(現 튀르키예 이스탄불) 전차경기장 (히포드롬)은 시민들의 스포츠 스타디움이요, 춤과 노래를 즐기는 공연장이자 써커스 광장이었다. 여기서는 곰이나 각종 동물들의 재롱을 볼 수 있고, 격투가의 주먹싸움이 벌어졌으며 시민들을 열광시키는 전차경기가 열렸다.

 

테오도라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곰 조련사로 일했다. 테오도라는 세 살때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먹고 살일이 막막해 진 어머니는 딸을 히포드롬의 무희(舞姬)로 만들었다.

 

경기장의 댄서는 만담도 하고,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오늘로 치면 만능 엔터테이너라 할 수 있지만, 당시 히포드롬의 댄서는 은밀한 매춘으로 부수입(?)을 챙기곤 했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주마등처럼 흐르는 지난  몇 년을 생각했다.

십대 후반 시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고관이 있었다.

그는 北아프리카 발령지로 가면서 테오도라를 데려갔다. 둘 사이에 아들도 한 명 얻었다.

 

히포드롬에서 누리던 팬들의 환호, 끼를 발산하며 느끼던 희열이 그립기도 했으나 탐욕과 정욕으로 가득찬 뭇 남성의 끈적한 시선과 추파를 더 이상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더 컸다. 

그런데....남편은 때리고, 남성 편력을 추궁하고, 술에 절었고, 무능력했다. 결혼은 깨졌다. 테오도라는 도망하다시피해서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테오도라는 다시 히포드롬에서 춤을 췄다.

남성들은 여신의 귀환을 환호했다.

 

몇 년 사이 테오도라는 한층 관능적이고 원숙해졌으며 남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기술도 훨씬 능숙해졌다.
군계일학의 춤 실력과 화려한 미모는 단연 압권으로 콘스탄티노플 사내들의 가슴을 들끓게했다..  

유스타니아누스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사랑의 열병으로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테오도라를 좋아했다.

 

춤은 이제 클라이맥스로 달린다.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빠져갈 즈음, 테오도라는 남의 눈에 띄기를 꺼리는 듯 몸을 숨기긴 채 기둥 옆 한구석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유스타니아누스를 발견했다.

“그럼 그럼지!”

 

테오도라는 그의 눈에 가득 찬 불꽃 같은 정열과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거야'

 

마흔 살의 유스타니아누스와 스물 둘의 테오도라는 불같은 연애를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도심 이곳저곳을 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추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저 처럼 천한 것은 어차피 원로원 귀족과 결혼할 수 없어요. 법이 그러니까!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테오도라 유스타니아누스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인하고 재촉하며 사랑의 밧줄을 조였다.

 

아무리 지체 높은 원로원 귀족이라도 넘을 수 없는 법의 장벽 앞에 괴로워하던 유스타니아누스가 어느날 테오도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대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소. 법을 바꿔서라도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소"

 

유스타니아누스의 외삼촌 그러니까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는 은근히 조카 편을 들었지만, 외숙모인 황후 유페미아의 반대는 격렬했다. "아유! 더러워. 더러워. 어디서 그런 여자와 결혼을!"

 

더럽다?......동시대 제국의 서기관이었던 프로코피우스는 '비잔틴제국 비사(秘史)'에서 테오도라를 음란한 창녀였다고 기술했다. 수 십 명 남성과의 난교, 변태적 성 집착, 극장이나 경기장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거리낌 없는 섹스 등 황색소설에서도 다루기 민망한 묘사로 테오도라를 혐오했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는 후에 유스타니아누스-테오도라 부부에 지독한 환멸을 표하며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임을 감안해야한다. 책이 프로코피우스 사후 몇백년 지나 발견됐고, 천년이나 지난 1623년에야 프랑스 리옹에서 출간됐다는 점도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얼굴은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 체구는 작았고 피부는 약간 창백했다. 시선은 쏘는 듯 날카로웠다(형형했다?). 자기가 연극배우(무희) 시절 겪은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어서 그걸 들어주려면 몇 날 몇 일을 새도 모자랄 듯하다" 

테오도라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서 나온 이야기다. 

창부라며 극도로 혐오하는 그가 이 정도로 후한 평가를 내리는 걸 보면 외모는 빼어났을 것이다. 

 

테오도라가 실제로 얼마나 비루(鄙陋)한 생활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유스타니아누스가 법을 바꾸면서까지 결혼한 것을 보면 과연 그 정도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스타니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고 뇌물도 주고 약점을 잡아 협박하기도 하며 결국 원로원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있는 법을 관철시켰다. (524년)

이듬해인 525년 마흔세 살의 원로원 의원과 스물 다섯의 전직 무희는 부부가 됐음을 신께 아뢨다.

 

유스타니아누스테오도라를 맞이한 후부터 대운(大運)이 활짝 폈다.

우선, 유스타니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518년, 당시 황실 경비대 사령관이었던 유스티누스는 후사 없이 죽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에 이어 어부지리로 황제에 올랐다.

 

전형적인 무장이었던 유스티누스는 행정과 통치행위를 버거워했고 넌더리를 내곤했다.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자 머리가 비상한 외조카 유스타니아누스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유스타니아누스가 황제의 브레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가 많았지만, 그의 판단과 추진은 나무랄데 없었다. 원로원 의원들도 유스타니아누스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527년 유스티누스가 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을 때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

 

공동황제로 등극한지 한달만에 유스티누스가 죽어 유스타니아누스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527)

테오도라와 결혼한 지 2년만에 제국의 최고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황제가 돼서도 테오도라에 대한 사랑에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극진해 졌달까?

"그대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내리겠소. 내가 제국의 법안이나 외교문서에 서명할 때 그대도 함께 서명하도록 할 것이오. 외국에서 온 사절이나 외교관도 함께 만납시다. 아우구스타인 그대의 의견은 곧 나의 뜻이오" 

테오도라를 사실상 공동통치자로 대한 것이다.

 

사랑꾼 유스타니아누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서 혁혁한 업적을 이뤘다. 

세계 건축사의 백미로 꼽히는 하기야 소피아를 재건(再建)하고 로마 법령의 총결산이며 인류문화의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로마법 대전(大全)을 집성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래 동방 오리엔트에 국한한 제국의 영토를 수복해 이탈리아 반도이베리아 반도 남부, 북 아프리카 해안선과 지중해의 중요한 섬들을 되찾아왔다.

 

 

나라가 클 때는 반드시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6세기 비잔틴 제국에는 유스타니아누스라는 영민한 황제와 벨리사리우스라는 뛰어난 장군이 투 톱으로 활약하며 '어게인 로마'를 구현했다.

이는 유스타니아누스가 38년 7개월이나 되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해 낸 것이다.

 

 

그런데 유스타니아누스는 하마터면 5년도 못 채우고 권좌에서 내려올 뻔 했다. 비잔틴제국 역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황제로 기록되기는 커녕 제국의 변방으로 도망가 숨어 살거나, 폭도들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운명의 532년 1월, 유스타니아누스 곁에 테오도라가 없었더라면 황제와 제국의 앞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유스타니아누스가 등극한지  5년이 되던 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 반란이라 불리는 폭동이 일어났다.

진원지는 전차경기장 히포드롬이었다.

 

 

전차경기장의 기수들은 흰색, 붉은색, 푸른색, 녹색 옷의 유니폼을 입었다. 관중들은 응원하는 기수별로 구역을 나눠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세월이 흐르며 네가지 색은 차츰 녹색과 푸른색의 두 팀으로 나뉘었다. 기수복 색깔은 결국 종교 성향별로, 귀족과 상공인이라는 신분별로, 정치적 지향점으로 편이 갈려 녹색당청색당이 됐는데 양 측은 거대한 적대세력으로 공고화됐다.

 

청색당은 대지주와 고위 귀족층을 대표하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숭배한 반면, 녹색당은 궁정의 하급관료와 상공업자, 기술자들의 연합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단성론' 신봉자들이었다. 

 

양 측은 자기 편을 미친듯이 응원하며 상대편에겐 욕설을 퍼붓고 저주했다. 때로는 유혈이 낭자한 난투(亂鬪)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다. 501년에는 녹색당 군중이 청색당 응원단을 무려 3000명이나 살해했을 정도니 내전(內戰)이나 다름없었다. 전차경기장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유스나티아누스는 평생 청색당을 지지해 왔지만 황제가 된 이후엔 양당의 적대감이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우리 편"이라며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던 청색당원들은 유스타니아누스가 일체 중립을 지키며 자기들 편을 들지않자 서운함을 느꼈고 반감이 커져갔다.

 

로마인의 일상은 빵과 전차경기가 전부라 했던가?

532년 1월 10일, 그날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전차경기를 보려고 히포드롬으로 모여들었다.

 

경주마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관중은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은 바작바작 탔다.

이날 따라 아슬아슬한 승부는 박진감을 더했는데, 그럴수록 관중들의 흥분지수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마침내 청색팀이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녹색팀 관중들은 중간에 반칙이 있었다며 경주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청색팀 응원단도 트랙으로 뛰쳐나갔다. 눈이 뒤집힌 군중들이 엉켜 싸우며 사상자가 속출했다.

 

"미치광이들이 또 날뛰는군! 언제까지 저런 놈들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하는가! 즉각 사태를 정리하시오"

유스나티아누스는 군대를 투입했다.

황제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우두머리급 여럿을 체포해 감옥에 투옥했다.

 

"이런 빌어먹을! 우린 이겼고, 떼를 쓰는 것은 저놈들이야!  개같은 놈! 황제가 되더니 초록색에 붙어먹었군"

"파란놈들이 반칙을 해 정당하게 항의하는데  왜 우리 당수를 감금한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충돌하자 그것이 엉뚱하게 황제에 대한 원망으로 치환됐다.

테오도라는 심상치않은 군중심리를 읽었다.

 

청색당은 자기편을 들지않는 황제가 미웠다.

녹색당은 황제가 그렇다고 자기 편으로 넘어오지도 않으면서 이전보다 더 심하게 자기들을 탄압한다고 생각했다.

트리보니아누스요한이니하는 고위관리 놈들의 거만함과 부정부패에도 넌더리가 났다.

유스타니아누스의 정복활동에 동원돼 죽거나 다치는 것도, 확장일로의 제국을 위해 돈과 부역을 바치며 생활에 부담이 가는 것도 싫기만 했다. 시민들에겐 미래에 펼쳐질 제국의 영광보다 현재의 안락과 엔조이(enjoy)가 소중했다.

 

"폐하! 전차경주를 금지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군중들은 잔뜩 화가 나 있어요. 어떤 행동을 벌일지 모릅니다"

 

"후훗! 괜찮을거요. 군중들을 선동하고 부추기는 양당의 당수들을 모두 체포했잖소. 그놈들을 처형해 본보기를 보이면 소란 따위를 일으킬 엄두도 못 낼 것이오"

 

모든지 상의하자던 황제가 이날따라 테오도라의 말을 흘려버리고 사흘 후에 열릴 전차경주를 허가했다. 

유스타니아누스는 군중에게 엄포도 놓았겠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돈을 걸고, 경주 후 주먹다짐을 하고 말겠지라며 그답지않게 신중치 못한 판단을 했다.


운명의 1월 13일, 전차경주장에는 어김없이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황제도 경기장에 나가 관람했다.

이들은 경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양측은 자기들의 응원석에 자리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니카! 니카!" "니카! 니카!"  니카 니카 니카 니카~~~~~~

이날 관중들은 전차경주 결과에 동요도 하지않았고 누가 이기든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그들의 외침은 메아리가 돼 콘스탄티노플을 휘감았다.

 

 

성난 군중은 청색당 녹색당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쳐댔다.

니카! 니카! 니카! 니카! (그리스어로 Στάση του Νίκα ) 이는 승리! 또는 이겨라!로 해석된다.

청색당, 녹색당 군중이 힘을 합쳐 황제를 무찔러버리겠다는 이야기다. 심상치 않다! 위험하다!

황제는 황급히 궁으로 '도망을 쳤다'

 

군중들은 관람대에서 내려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태우며 황궁으로 향하는데 흡사 거대한 리워야단(레비아탄)았다.

 

 

산과 들을 삼키는 화마(火魔)처럼 이들이 지나가는 곳은 초토화됐다. 관공서, 감옥, 고관대작의 집이 잿더미가 됐다. 제국의 심볼 하기야 소피아 성당도 불길에 휩싸였다. 원로원 의사당도 폭삭 주저앉았다.

500년전 폼페이를 사라지게 한 베수비오 화산의 기세가 이랬을까? 

이미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이를 말리는 병사며 관리들도 거리낌없이 죽였다.

황궁 앞까지 몰려온 시민들은 이제 황제 체포는 시간문제라 여기며 함성을 질렀다.

 

황궁 위에서 이를 보는 유스타니아누스는 생각했다. 

'아! 그 옛날 네로가 로마를 불태웠을 때도 이런 끔찍한 광경이었을까?'

황제는 넋이 나갔다. 냉정하고 침착한 그가 정신줄을 놓으니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새끼같았다.

 

그는 탈출을 위해 근위병들을 집결시키고 보물을 주면서 자신을 끝까지 호위할 것을 명했다.

허둥지둥, 우왕좌왕, 갈팡질팡 ....

이 순간!  허겁지겁 재물을 챙겨 달아나는 황제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다. 황후 테오도라였다.

 

그녀는 촛점마저 풀린 황제의 눈을 직시하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그녀가 한 말에 대해 수 많은 버전이 있지만 프로코피우스가 쓴 전사(戰史) 기록을 본다. 

 

“황제 폐하! 살기를 원하시나요? 살 수 있습니다. 폐하는 보물과 돈이 있고 그것을 실어나를 배도 저기 항구에 있네요. 그러나 그렇게해서 목숨을 부지한들 그 치욕은 죽음만 못할 것입니다.

 

폐하! 자주색 옷(황복과 황후의 옷)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옛말을 저는 믿습니다.

폐하께서 황복을 입고 시민들의 인사를 받지 못할 바에야, 저 역시 황후로서 시민들을 만나지 못할 바에야 소중한 자줏빛 수의를 입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기록도 비슷하다.

 

"통치권을 잃은 황제는 죽은 것입니다. 왕관과 예복을 입지않고 백성을 만나느니 전 죽음을 택하겠어요. 그런날이 제발 오지 않기를 신께 기도 드릴 것입니다.

 

불명예스런 삶에 매달려 수치를 택한다면 부끄러운 유배생활 끝에 비참한 죽음만이 기다릴 겁니다. 황제의 위(位)라는 영광스런 무덤이 낫습니다"

 

테오도라의 일침은 꾸짖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황제도, 함께 도망가려던 황궁의 관리들도 부끄러웠다.

정신이 확 돌아온 황제는 즉시 벨리사리우스문두스 장군을 불렀다.

"반란을 진압하라. 철저히 응징하라"


황제의 진압명령 몇 시간 전, 테오도라는 지레 포기한 황제의 태도를 보고 젊고 용맹한 장수 벨리사리우스문두스를 급히 찾았다.

 

환관출신의 노장 나르세스도 조용히 불렀다. 

그녀는 그들에게 많은 양의 금을 주며 모종의 밀명을 내렸다.

 

군중들은 빠르게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다. 10년에 한번 꼴로 터진 청색당과 녹색당의 피터지는 격돌은 그들을 사병(私兵)집단 수준 이상으로 근육을 키워 놨다. 이건 군중의 폭동이 아니라 반군의 거병과 같았다.

이들은 외쳤다. "유스타니아누스는 더 이상 비잔틴의 황제가 아니다"

 

"우리 황제는 이제부터 히파티우스다!" 히파티우스는 전전(前前)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로 노인이었다.

그는 군중에 의해 얼떨결에 추대됐지만, 대세를 보아하니 이미 자신이 황제가 됐다는듯이 희희낙낙하며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호에 답했다.

 

그런데 사태는 급변한다. 히포드롬쪽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이 황궁 앞 광장 쪽으로 도망해 들어왔다. 그들의 뒤에서는 중무장한 기병들이 창과 칼을 휘두르며 질풍노도처럼 추격해 왔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중무장 기병들이다.

 

군중들이 기병대를 막고있는 사이, 후방에서도 쇠 부딪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문두스 장군이 지휘하는 경무장 보병이 잘 훈련된 칼솜씨로 시민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환관출신 장군 나르세스는 군중들의 퇴로를 막아 히포드롬에 가둬놨다. 

 

그 무섭던 군중들은 이제 정예군의 창, 칼, 활의 표적이 됐다. 살육과 학살이 하루종일 이어졌다.

청색당과 녹색당은 황제 타도라는 목표 아래 동맹군으로 단단히 뭉친것 처럼 보였는데, 풀어진 볼트와 너트처럼 결속이 풀렸고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테오도라는 황궁의 테라스에서 학살을 지켜봤다. 

'젖니가 빠지기도 전부터 너희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서로 우리편이 정의롭다고 싸우지만 네놈들 탐욕과 정욕은 우열을 가릴 수 없지...." 테오도라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테오도라는 히포드롬에 죽치고 앉아, 달리는 전차가 마치 자신의 인생이라도 되는 양 희노애락하는 군중에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춤과 연극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대중의 관심이 그녀의 에너지가 돼 준 것도 사실이고, 어쨋든 그들에게서 나온 돈으로 연명하며 산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배설구로, 노리개로 살다가 버려진 수많은 무희들과 써커스단의 여성들을 생각할 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먼저였다.

 

테오도라는 군중 진압 작전이 있기 전, 세 장군을 불러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그녀는 우선 벨리사리우스문두스가 군중들 편에 서지 않도록 서둘러 채비했다.

사실 황제와 벨리사리우스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전술과 전략에 이견이 많았고 장군의 승전에 대한 황제의 포상(褒賞)이 너무 짯다는 이야기도 있다.

테오도라는 언제 돌이킬지 모르는 장군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금을 주고 그들을 '확실한 내 팀'으로 거머줬다.

 

나르세스에게도 금은보화를 주고 청색당의 우두머리급들을 포섭하게 했다.

나르세스는 청색당 수뇌부에 돈을 주고 "황제가 예전에 당신들을 얼마나 지원하셨는가? 궁지에서 구해주고, 녹색당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손을 써 줬던 일들을 잊었단 말이오? 황제를 몰아내고 히파티우스를 옹립하려는 저들의 수작을 왜 모르시오? 히파티우스는 조상 대대로 녹색당을 지지해왔소. 그가 황제가 되면 당신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 것 같소?"라며 청 · 녹 동맹을 이간(離間)했다.

 

군중 동맹은 작전체계와 전개에서 이견을 보이며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를 황제군이 파고들었다.

황제의 명령과 별도로 테오도라는 세 명의 장군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강조했다.

 

 

사흘 내내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시민들이 죽어갔다. 

나르세스에 의해 히포드롬에 고립된 군중들만 3만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

시내에서 죽은 이도 부지기수였다.

 

당대 서방세계 최고의 지성과 문명을 자랑하던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거대한 무덤이 됐다.

피를 씻어내고 시신을 치우는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히파티우스는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게 아니라 단지 군중들에 의해 추대된 것 뿐이라며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다.

 

유스타니아누스는 그를 사면하려했지만, 테오도라는 작은 불씨라도 확실히 꺼야한다며 처형을 고집했다.

히파티우스는 애꿎은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반란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진압 됐지만, 도심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타고 무너졌다.

수 많은 시민이 죽고 상업기반도 엉망이 됐다. 무엇보다 이런 혼란을 틈타 사방의 적이 도발해 올지 모른다.

 

제국은 다시 일어나야 했다. 황제는 군사조직을 이용해 콘스탄티노플의 치안과 소요를 확실히 통제했다.

난리 39일 후 부터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 복구에 나섰다. 제국은 서서히 로마의 위용과 관록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감을 되찾은 황제는 본격적인 고토수복을 선포하고 당장 다음해부터 반달왕국(북아프리카 해안과 이베리아 반도 남부)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535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영원한 본토(本土) 이탈리아 반도 수복에 착수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540년에는 고트족이 눌러앉아 있던 이탈리아 라벤나에 입성했다.

 

테오도라도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비천한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잇따라 마련했다.

소녀를 인신매매하는 사람에겐 끔찍한 고통을 주며 고문하고 불구로 만들었다.

자신이 당했던 일 - 억울한 이혼, 아니 쫒겨남 -을 돌아보며 이혼 당한 여성의 인권을 개선했다.

성매매 여성이 머물 수 있는 거처를 공적차원에 보장했다. 악덕 포주는 거세를 각오해야 했다.

강간범은 일체의 자비없이 사형에 처했다.

유스타니아누스가 제정한 많은 법령과 칙령에 황제와 함께 서명하며 여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테오도라는 훗날 비잔틴 제국 최고의 대제(大帝)로 칭송될 남편 유스타니우스의 혁혁한 성취를 돕다가 서기 548년 6월 28일 눈을 감았다. 추정하기론 암(癌)이었다.

565년 죽은 유스타니아누스보다 17년 먼저 세상을 뜬 것이다.

 

유스타니아누스는 생전에 25개 이상의 성당을 지었는데, 거의 모든 성당의 주춧돌에 테오도라의 이름을 새겼다.

부부 사이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하나와 입양한 두 명의 아들이 있다. 부부금슬에 비해 다산의 복은 없었다.

 

그 밖의 이야기들

 

- 6세기 비잔틴 제국의 새 지평을 연 이는 유스타니우스와 유능한 장군들이지만, 니카 반란 때 모든 것을 체념한 황제를 향한 테오도라의 일갈(一喝)은 유스타니아누스를 코마상태에서 각성으로 바꿔 단박에 판도를 뒤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에 대해 위대한 황후다, 더러운 요녀다, 이견이 분분하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육당한 군중과 그들의 가족은 모든 원망을 테오도라에게 돌렸다.

 

마녀, 매춘부, 더러운 갈보,,,온갖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씌워 다소나마 위안을 찾은듯 하다.

 

- 비잔틴제국 유스타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벨리사리우스 장군이다.

 

그는 약관 27세에 비잔틴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유스타니우스가 고토수복이라는 명목으로 일으킨 정복전쟁 대부분은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했다.

 

그는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 반 이상을 수복하며 승승장구했지만, 황제와의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황제는 540년 벨리사리우스이탈리아 반도 라벤나 전투에서 생포한 고트족의 왕 일디바드를 살려준 것에 대해 대노하며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한 적이 있다.

 

벨리사리우스는 전쟁 시 황제가 제공하는 보급과 병력이 너무 적다는 불만이 있었다.

정적들은 벨리사리우스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황제에게 고했다.

유스타니아누스벨리사리우스를 소환해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이내 무고임을 알고 그를 석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양대 거목인 유스타니아누스 황제와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565년 같은 해 죽었다.

 

-  542~54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큰 역병이 돌았다. 이른바 유스타니아누스 역병이다.

테오도라유스타니아누스가 결혼한 지 17년, 니카 반란이 일어난 지 10년 되던 때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학자들은 대략 거주민의 1/4 정도는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중세 유럽을 덮쳐 7500만~2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와 같은 역병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서에 의하면 "몇 달 째 계속된 역병은 하루 5천명 어떤 날은 1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비극은 몇달 째 지속됐다"고 증언했다. 흉측한 역병에 왜 황제의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한편, 유스타니아누스는 만년에 주로 신학적인 연구와 교회 제도 개선, 교리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는 등 종교적인 활동에 골몰했다. 

 

- 테오도라 첫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은 아버지와 아라비아에서 살았다고 한다.

황후가 된 테오도라에게 아들이 찾아왔다.

수 십 년만에 만난 모자(母子)는 눈물의 상봉을 했을까? 어머니는 아들을 따뜻하게 맞고 자식의 안락한 삶을 마련했을까? 이후 그 청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풍문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테오도라를 싫어했던 자들이 그녀의 냉혹함을 부각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