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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켈트 여왕 '부디카' 로마와 맞장뜨다 "우리는 강하다. 승리 아니면 죽음 뿐"

1세기의 브리튼 섬(現 영국)앵글로색슨族이 아닌 켈트族의 땅이었다.
서기 61년, 이 땅에선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르는 참상이 벌어졌다.
로마에서 온 잔학한 압제자들과 그들에게 대항하는 부디카(Boudica/Boadice) 여왕의 사투였다.

 

로마인들은 브리튼 섬브리타니아라고 불렀다. 부디카브리튼섬 거주하던 이케니족의 왕 프라스타고스의 아내였다. 로마에 복종하며 평온한 삶을 살던 이케니족프라스타고스가 죽은 후, 로마의 배신으로 지옥 같은 현실에 직면한다. 이때 부디카는 “토끼와 여우가 감히 개와 늑대를 길들이려 한다”며 무장항쟁에 나선다.
◆ 부디카((Boudica/Boadice) 생년 미상~61년

 

 

서기 43년 로마클라우티우스 장군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부족 단위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압도적인 로마군의 위용에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이케니족의 수장 프라스타고스 또한 그런 부족장 중 한 명이었다.

 

로마는 그를 이전처럼 왕으로 인정해 주었고, 프라스타고스는 굴종의 댓가로 지위와 평안을 누렸다. 

그러나, 서기 60년 프라스타고스가 죽은 후 많은 것이 바뀐다.

 

프라스타고스는 생전에 로마에 진심으로 복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죽으면서 “로마는 나를 왕으로 인정해 줬다. 나는 로마의 동맹자이자 신하다.

내가 죽으면 이 땅을 로마 황제와 나의 두 딸이 공동 통치하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말은 “로마황제시여! 저의 아내와 두 딸을 잘 거둬주소서”였다.

그 동안 좋은 관계였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이케니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프라스타고스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에서 많은 병력이 브리튼 섬에 상륙(上陸)했다.
로마군은 우악스럽게 주민들을 몰아내고 프라스타고스가 다스리던 영토의 절반을 빼앗는다.

이케니족이 그나마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능글맞을 정도로 살갑게 로마 총독의 비위를 맞추던 프라스타고스 덕이었는데, 총독 데키아누스 카투스(이하 카투스)는 그가 죽자마자 태도를 싹 바꿨다.

 

로마군 장교들은 부족민을 마구 다뤘다.
건장한 청년들을 노예로 부리고, 젊은 처자들은 성적(性的) 노리개로 삼았다. 
로마군인들이 보는 이케니족은 야만인이거나 사람과 짐승 사이의 어디쯤...정도에 불과했다.

 

부디카프라스타고스王의 아내였다. 
그녀는 두 딸과 함께 총독부를 찾아갔다. 
“왜? 프라스타고스의 유언을 지키지 않소? 돌아가신 왕이 총독에게 무엇을 잘못했나요?
이케니는 로마황제와 내 두 딸의 공동소유니 어서 군사를 물리고 빼앗은 것들을 돌려주시오”

 

 

카투스라는 인간...이 자는 콧방귀조차 끼지 않았다.
부디카를 기둥에 묶으라 하더니 힘 좋은 병사에게 채찍질을 시켰다.

뼈 조각이 박힌 로마군의 채찍에 부디카의 살점은 패이고 찢겼다. 피가 뚝뚝 떨어져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울부짓는 딸들은 병사들의 억센 손에 끌려 막사 뒤로 사라졌다.
부디카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딸 들이 내지르는 공포와 수치, 고통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딸은 로마병사들에게 윤간을 당했다.

 

부디카와 딸들은 찢겨 진 옷과 몸,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가지고 이케니로 돌아왔다. 

부디카는 이 치욕을 반드시 갚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학정은 계속됐다. 이런 소식은 근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병사들을 통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의 양식있는 일부 지도층은 브리타니아를 근심했다. 브리타이나도 제국의 일부 아닌가?
“총독이 그런 짓을 하다니! 제국의 병사들이 주민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한다고? 
사실이라면 이건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군”

 

전(前)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생전에 브리타니아人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돈을 브리튼 섬에 쏟아부었다.
브리타니아의 부족장들에게 넉넉한 기한에 상식적인 이자로 대출금을 지원했다.

 

이런 점은 프라스타고스같은 부족장들로 하여금 로마에게 복종케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프라스타고스 생전에 이케니는 부유했고, 주민의 생활은 풍족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은혜'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돈의 연결통로가 '사악한' 총독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는 줬지만 부족장들은 받은 게 없다!

 

클라우디우스는 일에만 묻혀 지낸 고지식한 인물로 막상 로마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황후 아그리파나가 아들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에게 독버섯을 먹여 독살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렇게 다음 황제가 된 자가 바로 잔혹과 광기의 대명사 네로(재위 54년 10월 13일 ~68년 6월 9일)다.

 

총독 카투스는 선(先)황제 클라우디우스브리타니아 부족장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내린 막대한 돈을 착복했다. 우선 빼 쓰고는 수습을 하지못했다.

 

“나중에! 나중에! 일단 내가 좀 쓰고 나중에 풀겠다는데 웬 말들이 많아!"

 

브리타니아인들을 화나게 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만일 당신이 현재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온 세계를 차지해도 불행할 것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긴 당대의 철학자 세네카다.

 

세네카는 물욕(物慾)을 경계하라는 자신의 격언과 달리 브리타니아인들을 상대로 추잡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세네카이케니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막대한 이자를 뜯어냈다. 철학자이면서 고리대금업자라니!

 

세네카브리타니아 지역에 4,0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 화폐 단위 중 하나)라는 돈을 꿔 주고, 조폭 사채업자 못지 않은 가혹한 방법으로 돈을 회수했다.

 

어느 정도 액수인지 불분명하지만 브리타니아를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의 1년 세수와 맞 먹는 엄청난 금액이라는 분석도 있다)

 

프라스타고스가 살아있을 때는 큰 어려움없이 넘어갔다. 그러던 것이 왕은 죽고, 돈줄이 끊기고 수탈이 더해지니 당장 일상을 보낼 돈이 필요하게 됐다.

 

그럴때,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 쉽게 빌려주는 천사같은(?) 금융인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렇게 빌려 쓴 푼돈은 눈덩이같이 커진 이자와 함께, 갑작스러운 원금 독촉으로 이케니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거기에 더해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인들에게 푼 지원금까지 대출금이라고 우기며 한꺼번에 갚으라고 닥달했다. 로마군병을 동원한 세네카 등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원주민의 집과 땅을 빼앗고 무기까지 몰수했다.

브리타니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원한이 사무쳤다.

 

부디카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딸을 대동하고 이케니족의 이웃 트리노반테스을 찾아갔다. 두 부족은 같은 켈트 계통이다.

 

트리노반테스족 역시 로마 총독의 학정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해 진 상태였다. 그들도 부디카와 두 딸이 당한 수치를 잘 알고 있었다.

부디카가 족장과 주민들 앞에서 열변을 토해냈다.

 

부디카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됐다.

"외모는 위풍당당했고 키가 매우 컸다. 쏘아보는듯한 시선은 사나웠고, 거칠고 큰 목소리를 가졌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덮었다. 큼직한 금 목걸이에 강렬한 색의 튜닝을 입었는데 그 위에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해 입었다. 항상 같은 복장이었다"

(로마 역사가 카시오스 디오(Cassius Dio)의 표현) 

 

"여기 제 두 딸이 있소. 이 아이들이 당한 지옥같은 일에 대해 들었을 것이오. 여러분의 아내도 딸들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오늘 형제들에게 우리의 복수에 함께 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 

횃불에 비치는 부디카의 얼굴이 비장한 각오로 번뜩였다. 주민들의 가슴이 요동쳤다.

 

"우리는 한때 로마인들과 평온하게 지냈소. 그러나 놈들의 교묘한 속임수는 우리를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자~이제 우리는 자유와 예속이 어떻게 다른지 알았소. 우리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들의 손을 덥썩 잡았습니다.  큰 실수였죠"

부디카는 남편이 로마인들에게 복종하며 택한 안락한 생활까지도 에둘러 비판했다.

 

"놈들은 부드러운 빵, 올리브유, 포도주를 먹어야하지만 우리는 나무뿌리와 풀을 먹고도 삽니다. 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 수 있고 험한 강을 맨 몸으로 헤엄쳐 갈 수 있는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이케니의 이웃 트리노반테스족 여러분이여! 우리 함께 싸웁시다.

토끼와 여우 주제에 어찌 감히 개와 늑대를 길들이려 한답니까?" (카시우스 디오로마사에서)

 

트리노반테스족은 숙의 끝에 로마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런 추세는 이웃마을로 또 이웃부족으로 확대돼 갔다.

어느새 봉기한 자들의 숫자는 10만을 상회했다. 당시 유럽의 외딴섬 브리튼의 인구를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였다. 

 

원주민들은 무기가 될만한 것들은 모두 들고 나와 로마인들의 거주지며 상업지역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약탈했다.

광기와 살의에 사로잡힌 브리타니아 연합군은 눈에 띄는 로마인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 

의로운 항거라던가, 압제자들로부터 조상의 땅을 탈환해야 한다는 거룩한 소명 따위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이케니 부족이 더 화가 난 것은 카투벨라우니족(族) 등 몇 몇 켈트계가 로마와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놈들과 동맹을 맺다니...."

 

부디카의 동맹 트리노반테스족은 로마 퇴역병들이 살고있는 카물로두눔으로 진군했다.

총독 카투스가 이 소식을 들었다. 

"경비병 몇 백 명 추려서 야만인들을 막도록 하라.

변변한 무기도 없는 거지떼같은 놈들이니 대가리급 몇 놈 잡아 죽이면 파리떼처럼 흩어져 버릴거다"

 

카투스의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져, 그곳에 사는 로마시민들과 퇴역병, 경비병 200명 모두 연합군에게 살육당했다. 

 

한편, 부디카 군(軍)은 론디니움(현재의  런던으로 비정)으로 향했다. 

당시 론디니움에는 로마신전이 있었고 테임즈강을 이용한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로마군은 이때 론디니움을 돕기 위해 제14 게르마니아 군단의 파견대(派遣隊)보냈다.

파견대는 부디카군보다 먼저 론디니움에 도착했으나 반군의 규모와 기세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파견대장은 시민들에게 론디니움을 포기하고 자신들과 같이 탈출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론디니움 시민들은 재물과 집을 두고 떠나기를 꺼려하며 머뭇거렸다.

 

"돈 좀 적당히 주고 달래면 괜찮겠지! 우린 당신들의 이웃이다, 정치인이나 군인과는 다르다! ...알아듣게 설득하면 뭐 별일 있겠어?" 론디니움 시민들은 사태를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했다.

파견대는 설득이 먹히지않자 어쩔수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시민들을 남긴채 도시를 빠져나갔다.

 

당시 론디니움 인구가 9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시민은 파견대가 도시를 떠난 후에야 부디카군이 여러 도시에서 저지른 학살의 참상을 전해들었다.

아뿔싸! 진작 빠져나갔어야 했다는 후회와 공포 속에 시민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부디카 군은 도시를 빙 둘러 포위했다.

론디니움로마인들은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브리타니아 연합군의 자비만을 구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연합군 사이에서 처음 의견은 분분했다. "아이와 여인, 노인들까지 죽일 필요야...."

"아니지! 차라리 젊은 남자 놈들을 살려둬야지. 노예로 팔아 넘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봉기군의 대부분은 로마에 너무나, 너무나 화가 나있다. 

"그냥 싹 다 죽여버리자"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연합군의 에너지는 오로지 저 광란에 가까운 분노에서 나오고 있다.

부디카는 그 동력을 끌 생각이 없었다. 부디카와 지도부는 봉기군의 살육을 방치했다.

 

론디니움은 지옥으로 변했다.

9만에 가까운 시민과 론디니움 수비병이  빠짐없이 차례차례 학살됐다.

 

"폭도들이 로마 귀부인을 사로잡아 유방을 도려내고 그걸 입에 쑤셔넣더니 부인의 입을 꿰매 꼬챙이에 꿰 죽였다"는 역겨운 기록(물론 로마의)이 있을 정도로, 글로 쓸 수 없을 만큼 극악무도한 살육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테임즈강은 시민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고 집과 신전이 모두 탔으며 고통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와 비명이 온 도시를 휘감았다. 로마와 동맹한 카투벨라우니족의 근거지 베룰라미움도 약탈, 방화, 살육으로 초토화됐다.

 

그러나, 이런 비극의 빌미를 제공한 총독 데키아누스 카투스는 이미 범선을 타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로 줄행랑친 지 오래였다.

카투스를 잡아 발가벗기고 죽을 때까지 채찍질 하려했건만....부디카는 분루를 삼켜야했다.

 

"흐음~듣자하니 안되겠군. 총독이라는 놈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지않나.

별 쓸모도 없는 브리타니아에서 아까운 병사들만 희생시킬 순 없지!"

황제 네로는 병력을 철수하려고 마음 먹었다.

명령서가 막 브리튼섬으로 떠나려 할 때 뜻 밖의 전갈이 들어왔다.

 

군단장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Gaius Suetonius Paulinus-이하 수에토니우스)가 뜻밖에 분전하며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선(先)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절, 프톨레마이오스에서 해방노예 아이데몬의 반란을 깔끔하게 진압했습니다. 출중한 장수죠"

원로원 의원들이 수에토니우스를 추천했다.

 

그는 60년에 모나 섬(現 앵글市)에서 일어난 드루이드 신자들의 반란도 무자비하게 눌렀다. 이때 드루이드 족이 숭배하는 떡갈나무 숲을 불태우고 신자들을 학살한 냉혹한 장수다.

어쨌든, 이 시국에 부디카의 봉기를 진압할 적임자로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네로수에토니우스를 진압사령관에 임명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섬에 흩어져 있는 로마군 패잔병들을 끌어모았다. 

 

론디니움 시민들을 구하러갔던 제14게르마니아 파견대를 비롯해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을 모으니 약 1만 명의 병력이 됐다.

 

그러나 엑서터에 주둔한 제2아우구스타 군단장은 미쳐 날뛰는 10만의 야만병을 진압할 가망은 없다며 병력 차출을 거부했다.

 

수에토니우스는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 1만이면 훈련도 안됐고 조직력도 없는 '야만병' 10만을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진용을 짜고 군사를 배치했다.

 

로마군의 움직임을 부디카도 간파했다.

그녀는 이번 싸움이 향후 브리타니아에서 켈트 종족의 미래를 가늠할 회심의 일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부디카는 다시 연단에 올랐다.

"나는 이케니왕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종족의 대표로서 나선 것이오. 나 자신이 채찍질 당했고, 능욕을 당한 딸의 어머니로서 복수하려는 일념 뿐이오. 로마놈들은 더러운 탐욕으로 우리를 파괴했고, 놈들의 정욕은 여인들의 순결을 앗아갔소.

 

우리 신은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우린 로마인들을 물리쳤소. 놈들은 도망칠 궁리만 할 뿐이오. 놈들은 우리의 돌격은 커녕, 함성소리만 들어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자~ 이제,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오"

(타키투스 로마편년기)

 

수에토니우스로마병사들에게 외쳤다.

"야만인들을 겁내지 마라. 놈들은 시끄럽기만하고 군인도 아니다. 여자가 지휘하고, 장비도 없고 무기는 조악하다. 우리는 늘 놈들을 제압했다. 놈들은 우리 무기만 봐도 오금을 저릴 것이다.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제압하고, 칼로 숨통을 끊어라. 당분간 약탈은 삼가라. 어차피 모든게 우리 것이니까" (타키투스로마편년기)

 

양 군은 와틀링 가도를 따라 마주오다가 오늘날의 애서스톤 즈음에서 부딪힌 것으로 추정된다.

 

수에토니우스는 넓은 평원에 진을 쳤다. 

이 노련한 장수는 행군해 오는 동안 들과 집, 식량까지 모두 불태우는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썼다. 

로마군이 밀리면 연합군이 진군해 올텐데, 그들이 쉴 곳과 먹을 것을 아예 없애고자 한 것이다.

 

협곡이나 숲도 피했다. 수에토니우스가 볼 때 야만인들은 무질서하고 진용이 조잡하다.

로마군의 병력이 적지만 탁 트인 평원에서 강대강으로 맞붙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가운데 정예병을 배치하고, 좌우로 보충병을, 날개쪽으로 기병을 포진했다.

 

연합군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만만했다. 일단 병력 차이가 열 배 가까이 많다.

봉기 이후, 로마군을 내쫓고 로마시민을 죽이면서 자만심도 생겼다.

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다녔다. 행렬의 끝에는 수레에 탄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이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점을 노렸다.

"느슨하고 무질서 한 야만인들의 진용을 봐라! 각 부대는 탄탄하게 진을 구축하고 절대 물러섬 없이 싸워라"

 

연합군은 그 동안 압도적인 수적 우세 속에 우격다짐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쉽게 이겼기에 똑같은 그림이 그들 머리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드디어 로마의 저력이 나온다. 700년을 전쟁과 정복으로 키워 온 제국이다.

카데나치오처럼 단단한 수비망과 철저하게 분화된 공격전술 앞에 연합군의 전열이 차츰 흩어진다.

 

 

우왕좌왕 손발이 맞지않자 다른 부족에게 책임을 미루며 다툼이 일어났다. 자중지란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이 우루루 무너지면서 후퇴 러시가 일어나는데, 맨 뒷 열에 세워둔 마차와 수레, 가족들이 그들의 퇴로를 막는 장애물이 됐다.

 

연합군 전사가 퇴각하며 자기 가족을 깔아뭉개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러자 전사들은 싸울 생각보다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더 급해졌다. 뒤 돌아선 전사들 위에 다른 전사들이 덥치며 압사에 압사가 이어졌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 부디카와 지휘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수레 앞을 막아선 사마귀랄까? 무너지는 둑을 홀로 막아서는 것 같았다. 

 

로마군에 의한 거대한 제노사이드가 하룻사이에 벌어졌다. 

겨우 400명의 전사자를 낸 로마군에 비해 8만 명 이상의 연합군이 이날 죽었다.

가족들도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했다.

들판엔 시체가 가득했고, 피가 냇물처럼 흘렀으며, 새와 들짐승은 거리낌없이 만찬을 즐겼다.

 

로마는 이날의 승리를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했다.

병력차출을 거부했던 제2아우구스타 군단장은 자신의 오판에 깊은 자책감을 느껴 자살했다. 

 

살육의 광풍이 휘몰고 간 들판엔 황량한 바람만 불었다.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부디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부디카가 두 딸과 함께 음독자살 했다는 소문이 들여왔다. (타키투스의 說)

어떤 이는 그녀가 어디론가 퇴각했다가 싸움의 상처가 덧나,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카시우스 디오의 說)

 

연합군 일부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간헐적인 싸움을 이어갔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대항은 곧 개죽음이었다. 

그들은 부디카의 시신을 수습해 브리타니아人의 의식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뤘다.

부디카의 시신이 땅에 묻히자 연합군은 본래의 부족민들로 돌아가 고향으로 흩어졌다.

 

브리튼 섬은 이후 브리타니아로서 350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그밖의 이야기

 

기록은 승자의 편이며 문명의 것이다. 부디카라는 인물은 사실 로마인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에 수에토니우스라는 주연배우를 돋보이게하는 악한 상대역으로 존재한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는 않다. 훗날 잉글랜드 땅의 주역이 앵글로 색슨으로 바뀌며 부디카는 천 여 년 동안 잊혀졌으나, 16세기 스페인과 패권을 다투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대부터 민족의 영웅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을 제2의 부디카로 떠받드는 백성들을 흐뭇해 했다.

앵글로색슨族인 엘리자베스 1세빅토리아 여왕이 켈트族인 부디카영국의 위대한 정신으로 추앙한 것이다.

 

영국의 고대 역사를 보면 브리튼섬의 지배자는 여러번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이베리아인이 주류로 살다가 기원전 6세기 경 켈트족유럽대륙으로부터 건너와 터를 잡았다. 이때부터를 영국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브리튼을 점령했고, 부디카 시대의 혼란을 거치긴 했지만 410년 까지 로마의 지배는 공고했다. 이 시절 조성된 론디니움 항구가 영국의 수도 런던의 기원이 된다.

 

- 부디카의 남편 프라스타고스 왕은 일찍이 로마에 순응키로 하고, 로마에서 제공하는 황제의 하사금과 자신의 지위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았다. 부디카의 봉기는, 따라서 자존이나 민족의식보다는 자신과 딸이 당한 수치에 대한 복수와 로마 총독의 학정, 경제난에 대한 반발이 그 원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며 훗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중세 이후 유럽 각국이 각축을 벌일 때, 부디카는 외세와 맞서 싸우는 강인한 잉글랜드 정신의 상징이 됐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들을 부디카에 투영하면서 여성리더이자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활용했다.

 

- 로마 입장에서 프라스타고스가 죽으면 이케니로마의 땅이었다. 프라스타고스 생전에 말 잘 듣는 그를 왕으로 추켜 세워주던 것 뿐이기 때문이다. 로마로서는 단지 호의였다.

프라스타고스도 그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두 딸에게 영토와 재산을 남긴다"는 말 대신에 "로마황제와 두 딸이 이케니를 공동통치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은근슬쩍 자기 혈육의 이케니 지배 여지를 남긴 것이다. 물론, 로마는 이를 용납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