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5 (토)

  • 구름많음동두천 28.1℃
  • 흐림강릉 22.7℃
  • 구름조금서울 28.0℃
  • 구름많음대전 28.2℃
  • 구름많음대구 28.5℃
  • 맑음울산 28.8℃
  • 구름많음광주 29.3℃
  • 맑음부산 28.2℃
  • 구름많음고창 28.0℃
  • 맑음제주 26.8℃
  • 구름조금강화 25.0℃
  • 흐림보은 26.7℃
  • 구름많음금산 27.8℃
  • 구름많음강진군 30.4℃
  • 구름많음경주시 27.8℃
  • 맑음거제 28.3℃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women in history

불요불굴(不撓不屈) 쯩(徵)자매, 베트남 민족혼 2천년의 '고갱이'

서기 40년경 베트남(당시 남월-南越 ·이후 남비엣)한(漢)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기원전 111년 한(漢) 제국에 점령당한 지 150년이 지나면서  남비엣에 대한 침략자의 수탈과 학정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기원전 108년, 역시 한(漢)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운명을 겪은 것이다.

 

이 시기, 한나라의 폭정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고 독립국가까지 세운 베트남의 영웅이 있었으니, 쯩짝(徵則 Trưng Trắc), 쯩니(徵貳 Trưng Nhị) 자매다. 영웅적 저항은 비록 짧고 장렬하게 연소됐지만, 쯩 자매의 불굴의 투쟁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베트남 민족의 가슴 벅찬 긍지로 불타고 있다. 쯩 자매 이야기다.

▶ 쯩짝 (14년경~43년)  쯩니(14년경~43년)

 

 

한(漢) 태수의 폭정....남편의 분사(憤死)

 

그날도 어김없이 한나라 병사는 거들먹거리고 다니며 남비엣(南越) 백성을 함부로 대했다.

"이 자식! 이 달도 그냥 넘어갈 셈이군! 세금을 못 내면 네 마누라라도 바칠테냐?"

"나으리! 용서하십시오. 조금 말미를 주시면 반드시!!! 아악~~!!"

 

초로의 남성을 닥달하던 한나라 병사가 매달려 비는 그의 아내의 배를 걷어찼다. 

아낙은 길바닥에 널부러지고 이를 말리는 남편은 병사들이 내려친 몽둥이에 맞아 뒤통수에서 피를 뿜었다. 

 

거리를 지나던 티 사익(Thi Sách)은 눈 앞에서 자행되는 한(漢) 병사의 만행을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티 사익은 이웃의 불행을 함께하고 솔선수범하는 성실한 지도자로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축일, 장례식, 혼례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한나라에 대한 투쟁과 독립의 당위를 이야기했다.

 

따라서 그는 한나라에서 파견한 태수 소정(蘇定)의 감시대상이었다.

소정티 사익이 다른 마을의 락장들과 무장봉기까지 획책하고 있다는 첩보를 확보하고 있던 터였다.

작은 꼬투리도 잡혀서는 안될 것이기에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쯩짝은 그날따라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수행 몇 명과 함께 마을로 나간 티 사익이 까닭없이 궁금했다. 

조용히 실력을 길러 장차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하거늘 아직 젊기 때문일까?

남편은 쯩짝의 만류에도 도통 끓는 피를 제어하지 못하고 한(漢) 관병들과 충돌을 빚곤했다.

 

쯩짝은 자존과 독립을 역설하는 티 사익에 깊이 동조하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튀어나온 못이 머리를 얻어 맞는다. 이렇게 대놓고, 한나라 관청에게 보란 듯이 나서서는 안될 터였다.

 

아침부터 무예 단련에 한창인 쯩짝에게 마을사람들이 숨 넘어가는 표정으로 달려왔다.

"쯩짝! 자네 남편이 한나라 병사들에게에 끌려갔어" 

"아휴~ 거기 가면 온전한 몸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던데...이를 어째"

 

아니나 다를까! 티 사익 일행은 까닭없이 사람을 때리는 한(漢) 병사들을 말리다 급기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병사들을 흠씬 두들겨 팬 티 사익을 한군(漢軍)이 체포해 간것이다.

 

티 사익한(漢) 태수 소정 앞에 무릎 꿇려져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병사들의 부당함을 질타했다.

태수 송정은 무심한 얼굴로 티 사익의 항변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는....

 

'후우~~~' 쯩짝은 긴 한 숨을 내뱉었다. 밤 새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디 한군데 부러지더라도, 아니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살아서만 돌아왔으면....' 

아내의 간절한 바람에도 티 사익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태수 소정은 평소 눈엣 가시였던 티 사익이 사고(?)를 치자 기다렸다는 듯 처형해 버렸다.

 

한나라남비엣을 점령한 이후 100여년 동안 지방 토호(이를 '락장'이라고 한다)를 통해 간접통치했다. 그러나 이즈음 정책 기조를 바꿔 직접 지배를 강화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토호의 권한으로 인정해 주던 세금징수권까지 박탈해 직접 징세에 나섰다.

 

한나라 복장을 강요하고 남비엣의 문화를 야만이라 업신여기며 장례, 결혼 풍습까지 바꾸려는 강압적 동화정책이 가속화됐다.  한(漢) 태수들은 남비엣을 크게 한탕할 수있는 노다지로 여겨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수탈적 징세가 도를 더해갔다.

자연히 남비엣의 토호(락장)들과 주민들이 반감을 드러냈고 때로는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하노이 인근 마을 메린락장(酪將-Lạc tướng) 쯩짝-쯩니의 아버지는 두 딸에게 "너희들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무예 연마와 글 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때가 되면 나라를 찾기 위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락장이란 당시 남 비엣의 지역 토호를 부르는 명칭으로 부족장같은 개념이다.

쯩짝쯩니 자매는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남비엣의 자존'을 신앙처럼 키웠다.

 

쯩짝은 19살 되던 해 이웃마을 추지엔(朱鳶)락장 티 사익(詩索 · ? ~ 39년)과 결혼했다. 

남다른 의협심으로 주민에게 존경받던 남편은 한(漢) 태수 소정(蘇定)의 -어쩌면 함정- 어이없는 판결로 젊디 젊은 아내를 남긴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몇 날 며칠의 장례기간 동안 쯩짝은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울분을 다스렸다.

분기탱천(憤氣撑天)하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울부짖다가 혼절까지 한 것은 오히려 동생 쯩니였다.

 

 

 

호피(虎皮) 격문, 자매의 결기....남비엣 봉기하다

 

죽은사람처럼 며칠을 보낸 쯩짝이 긴 침묵을 깨고 홀연히 털고 일어섰다. 그는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언제까지 목숨과 재산을 빼앗기며 살아갈까요? 딸과 아내를 노리개로 내주며 살까요?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서 저 악랄한 압제자들을 몰아냅시다"

 

쯩짝의 호소는 애절하고도 비장한 것이었으나 군중들은 호응이 없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같은 오합지졸들이 어떻게 저 거대한 한나라 군대를 내쫒고 독립을 이룬단 말인가?

분하고 원통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더군다나 지휘관이 여자라니?

 

쯩니는 분개했다.

"못난 놈들! 남자들이 저렇게 용기가 없고 나약하니 이 꼴을 당하고 살지!"

뛰어난 무예실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쯩니는 매우 다혈질이었다.

후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쯩짝이 지휘와 전술을 맡고 쯩니는 게릴라 전투의 현장에 나섰다는 기록을 보면 쌍둥이 혹은 연년생인 자매의 성향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그가 쯩짝에게 말했다.

"언니 활과 칼을 챙겨요. 밀림으로 들어갑시다"

"........밀림엔 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벗겨 거기에 격문(檄文)을 쓸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이 쪼그라든 백성들을 각성케해야겠어"

"........"

 

잠시 망설이던 쯩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매는 활을 메고 칼을 챙겨 밀림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차분한 기다림보다 저지르고 보는게 나을 때도 있다.

 

밀림에 들어간 자매가 과연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숨 죽이고 기다리는 주민들 앞에 호랑이 피로 적신 자매가 나타났다.

유혈이 낭자한 자매의 모습을 본 주민들은 부끄러움과 솟구치는 투쟁심을 동시에 느꼈다.

 

쯩니는 호피에 적은 격문을 읽었다.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요동시켰음에 틀림없다.

이후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자매의 결기는 마침내 남비엣 백성들의 대(對) 한(漢) 항쟁을 이끌어냈다.

 

부대 단위를 나누고 대오를 갖춘 후 진용을 꾸리자 제법 군대같은 모양새가 나왔다.

자매가 사령관으로 나섰다. 어린 소녀에서 임산부까지도 부대에 합류했는데 꽤많은 여성이 지휘관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여성의 입김이 강한 베트남의 전통은 이때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쯩 자매의 항전(抗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쩐(黎眞·서기20~43)도 이때 합류한 여장군이다.

 

소정레쩐의 고향인 동찌어우에 행차해 그녀의 부모를 닥달했다. 레쩐을 첩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레쩐은 소문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레쩐은 완강히 거부하고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화가 난 소정레쩐의 부모를 죽였다.

 

레쩐은 이후 부모의 복수를 위해 안즈엉(지금의 하이퐁)이라는 곳에서 뜻을 품은 장부들과 손잡고 게릴라 부대를 만든다. 이즈음 레쩐메린 자매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매에 합류한다.

자매는 레쩐에게 성진공주(聖真公主), 진동대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한(漢) 태수에게 남편을 잃은 이와 부모를 여읜 이가 만나 복수를 다짐하는 피의 맹약을 한 것이다.

 

자매 부대는 태수 송정이 있는 관청부터 급습했다. 대규모의 진압부대가 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관청의 병사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수 천 명의 성난 주민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한나라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시신이 쌓이고 피가 흥건히 흘렀다.

"태수! 태수놈을 잡아라!!" 쯩니는 목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레쩐도 미친듯이 소정을 찾았다.

그러나...소정은 태수라는 직분도 망각하고 이미 한나라로 줄행랑을 쳤다.

 

쯩짝의 분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정의 목을 베 남편의 영전에 바치려했건만....

자매는 서로를 붇들고 통곡하고, 레쩐도 땅에 이마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퍼만 하겠는가? 사사로운 복수보다 더 큰 사명이 있다.

 

남비엣人의 나라....'쯩 느 브엉' 개국(開國)하다

 

의 관청을 접수한 봉기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무기고를 털어 '진짜' 무기로 무장을 하니 자신감은 날개를 달았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인근 지역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한(漢) 주둔군(軍)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못하도록 짧은 시간에 게릴라식 전술을 폈다.

마을을 장악할 때마다 그곳의 남비엣 백성들이 자원해 부대에 합류했다.

안개 입자처럼 미약한 한사람 한사람이 같은 신념 속에 뭉치자 거대한 탁류(濁流)가 됐다.  

울분으로 일어난 '난동집단'은 어느새 당당한 남비엣군(南越軍)으로 변모했다.

 

싸우면 이겼고, 공격하면 점령했고, 높고 두렵기만했던 한나라 군사들을 허수아비처럼 흩어버렸다.

지야오치, 끄우쩐, 녓남, 허푸(合浦)에 이르는 65개 성을 두 달만에 손에 넣었다.

 

 

"점령이 아닌 탈환이다! 이 땅은 원래 우리 것 아닌가!" 

"우와아~~~~!!!"

쯩짝의 외침에 병사들의 함성은 천지에 요동쳤다.

 

코끼리 등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는 쯩짝쯩니 자매, 남비엣의 또 다른 여성 맹장 레쩐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백성의 자부심이자 독립의 상징이 됐다.

 

쯩짝쯩니는 그후 2년 동안 미처 철수하지 못한 한(漢)의 잔당을 속속 제거하는 한편, 착실히 내치를 다졌다.

서기 39년 봉기한 자매는 40년 3월 고향 메린에 도읍해, 꼬라이에 궁을 지었다.

쯩짝은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세금을 2년간 면제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쯩짝은  여왕(徵女王, Trưng Nữ vương · 쯩 느 브엉)으로 불렸다. 쯩니는 부왕(副王)에 올랐다.

쯩 느 브엉(徵女王)레쩐을 시켜 안비엔(지금의 하이퐁 인근)과 땀박(Tam Bạc) 강(江) 일대를 개간해 농지로 일궜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과 뽕나무는 남비엣의 탄탄한 경제기반이 됐다.

진정한 남비엣 백성의 나라, 그들의 시대가 눈 앞에 보였다.

 

한(漢)의 반격....명장 마원의 침공

 

그러나 한(漢)은 이 엄중한 사태를 좌시하지 않았다.

 

"소소한 말썽이라 여겼던 남쪽의 소란이 심상치않은 국면으로 가고 있소"

"남쪽 야만의 무리(南蠻-남만)가 자기들의 나라를 선포했고 더 어처구니 없는건 계집이 왕(王)을 참칭한거요. 남비엣에서는 세금으로 쌀 한 톨 들어오지 않소"

 

한(漢) 조정은 쑥대밭이 됐다. 

일찍이 유방(劉邦)이 초한쟁패(礎漢爭覇)에서 이겨 개국한 이래, 흉노를 극복하고 서역과 남쪽을 평정했으며 동쪽의 강국 조선(朝鮮)을 멸하여 동서남북으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영광의 시대였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한(漢)이 가장 기괴하게 생각한 것은 남비엣 군사 지휘관의 태반이 여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은 더 쉬워보였다. 간단히 진압하고 우두머리의 목을 베 황제의 위엄을 보이리라했던 안일한 생각에 곧 경종이 울렸다.

한(漢)은 여러차례 남비엣에 진압군을 파병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한(漢)광무제(光武帝)는 최정예 부대를 보내야만 했다. 마원(馬援)을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하고 3만의 정병을 꾸렸다. 마원은 삼국지를 통해 익숙한 맹장 마등, 마초의 조상으로 중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명장이다.

 

마원은 늘 "대장부는 마땅히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고,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돌아오면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는 '뼛 속까지 무장(武將)'인 인물이었다.

 

광무제마원에게 "어려운 것이 있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붙여줄테니 애로를 해결하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제국 최고의 무장을 파견한 것을 보면 한(漢)에게  자매 봉기는 그만큼 무겁고 깊은 근심이었다.

 

마원남비엣의 지리적 특성을 미리 꿰고 전장(戰場)과 가까운 중국 남부에서 병사를 징발했다.

육로는 물론 배 2천 척의 대선단(大船團)을 꾸려 남비엣꽝닝 하구(하이퐁 인근)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서기 42년 1월, 마원이 이끄는 한(漢) 진압군이 남비엣 지경(地境)을 넘어섰다. 

 

그러나 초기 전황은 마원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육군의 경우, 남비엣과 가까운 남부병사 위주로 편성한 부대였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습한 날씨,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장대비, 괴상한 벌레들, 마시면 탈이 나는 물, 풍토병,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치고 빠지는 숲속의 날랜 적에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훗날 촉(蜀) 승상 제갈량남만 원정 때 겪어야 할 삼국지 발(發) '소설'이 그대로 현실이 됐다.

간헐적인 국지전에서도 남비엣의 게릴라전에 말려 꽤 많은 병력을 잃었다. 

 

마원은 그러나 제국을 대표하는 명장답게 악재를 극복하며 서서히 국면을 전환해 나간다.

한(漢) 군 지휘부는 자생 약초를 잘 아는 주민을 고용해 풍토병을 다스렸다.

병사들도 서서히 남비엣의 기후에 적응해갔다. 

 

한편, 한(漢)의 해상군은 꽝닝 하구에 상륙해 남비엣을 압박했다. 쯩짝은 여(女)장군 타잉티엔(Thánh Thiên · 10~43)에게 육군을 맡기고, 해상으로 오는 적은 레쩐과 여(女)장군 밧난(Bát Nàn· 17~43)에게 막도록 했다.

 

장렬한 최후, 불멸의 고동(鼓動)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마원의 군사는 개전 초기와 완전히 달라졌다. 해상병까지 가세하자 전황은 한 순간에 한(漢)쪽으로 기운다. 사실 장비의 수준, 물자의 규모, 병력의 수와 훈련의 질에서 남비엣과 비교하기 어려운 현격한 열세였다.

 

레쩐이 막아 선 바익당 강(江) 전투에서부터 전력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비엣 군은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한(漢)의 전투력이 더 강하고 노련했다.

남비엣군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기는 이미 틀렸다. 막을 수 없으니 메링으로 퇴각한다. 빨리 가서 쯩 브엉(徵王)을 도와야한다"

레쩐은 다급히 후퇴했다.

 

한편, 랑 박(浪迫 · Lãng Bạc) 지역에서 한(漢)과 싸우던  자매와 타잉티엔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마원은 육군과 해상군을 묶어 총공세를 폈다. 

전열이 흩어지는 가운데, 일부 지역 락장들이 병사를 거둬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漢)군이 은밀하게 진행한 이간계가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한(漢)군 사령부는 재물에 눈 먼, 또는 겁에 질린 자들을 포섭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심리전이다.

"신장(神將)  마원의 군대가 스쳐만 지나가도 코로 숨쉬는 것은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다 죽는다.

하지만 항복하는 자들에겐 식량까지 나눠주며 자비를 베푼단다"

 

공포가 비수처럼 파고들며 안락으로의 회귀 욕구가 꿈틀댔다.

연승의 환호도, 해방의 희열도, 독립의 자부심도 반복되는 전쟁의 지긋지긋함에 묻혀갔다.

부족연합 형태인 쯩짝 부대의 구조적 한계였을까? 허물어지는 속도도 빨라진다.

 

많은 병력이 이탈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병력은 죽음을 불사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쯩니가 말했다.

", , 다이 세개의 강을 건너 험한 산으로 들어가 진을 친다. 강(江)이 적의 진군을 늦추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한다"

 

레쩐은 "한(漢) 군사가 우리를 쫓아 강을 건널 것입니다. 깊은 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골짜기에 다다르면 이를 섬멸하겠습니다"라고 쯩브엉에게 말했다.

 

그러나 레쩐의 매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마원군은 쓰나미처럼 돌진해 남비엣군을 덮쳤다.

 

잣저우山 (現 떤썬 일대)으로 퇴각해 몸을 숨긴 레쩐의 코 앞에까지 적이 다가왔다.

중과부적...... 레쩐은 단도를 자신의 목에 박았다. (43년 7월 13일) 스물 셋의 꽃다운 나이는 그렇게 졌다.

 

자매와 타잉티엔레쩐의 장렬한 최후를 보고받았다. 이제 자매의 부대도 괴멸됐다.

 

자매는 쏭코이 강가에 이르렀다.

"쯩 브엉.....아니 언니....."

"그래. 우리 꿈을 이루지 못해 슬프지만.....그래도 한바탕 후회없는 싸움을 벌이고 가는구나..."

 

자매는 손을 잡고 쏭코이 강 절벽 앞에 나란히 섰다.

"살아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자매는 강물 위로 몸을 던졌다. 타잉티엔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면초가(四面礎歌) 속에 자결한 항우를 연상케하는 장면이다.

 

자매가 남긴 쏭코이 강의 파문(波紋)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그때 쯩 자매, 레쩐, 타잉티엔남비엣 백성이 일으킨 위대한 항쟁은 베트남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큰 북으로 남았다.

 

베트남 민족은 지난(止難)과 신고(辛苦)의 역사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중국의 오랜 지배와 프랑스 식민지를 극복한 베트남은 현대에 들어서도 프랑스, 중국, 미국을 물리치며 자존심을 만방에 떨쳤다.

베트남인들은 그 원동력을 '하이 바 쯩' 정신에서 찾는다.

 

하이 바 쯩 (Hai Ba Trưng)....Hai는 '' Ba는 '할머니'라는 뜻이란다. '쯩 할머니 두 분'이란 친근과 존경의 호칭이리라.

 

남비엣의 위대한 두 할머니 -죽은 나이로 보면 누나 또는 아씨라는 표현이 타당하련만-는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베트남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밖의 이야기들

 

- 남비엣마원에게 패한 이후, 서기 938년 (한국사로는 고려 태조 왕건 재위 21년차) 응오꾸이엔(Ngô Quyền, 吳權 · 898~944)이 응오 왕조를 세울 때까지 근 천년을 중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서기 248년에는 오나라손권에 대항해 자오 부인 (찌에우 티 찡이라고도 함)이 봉기했다. (또 여(女)장군이다!!)

그녀는 황금색 갑옷을 입고 코끼리에 올라 군사를 휘몰았다고 하는데 손권의 장수 육윤(陸胤)에게 패해 자결했다.

그러나 베트남 민족은 크고 작은 봉기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중국에의 완전 복속을 거부했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천년 피지배국의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날 신흥 개발도상 강국으로 부상한 베트남의 저력일 것이다.

 

-중국 사서 후한서(後漢書)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은 "이듬해(건무 19년 · 서기 43년) 여름 4월, 마원교지(남비엣을 이름)를 격파하고 쯩짝, 쯩니 등을 참하자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거나 흩어졌다(援破交阯,斬徵側、徵貳等,餘皆降散). 계속 진격하여 구진의 도적인 도양(都陽) 등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그 거수(渠帥) 3백여 구를 영릉(零陵)으로 옮겼으니 이에 영포(領表)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드라이하게 기술한다. 

 

베트남 사서 사기대월전서 여왕기에는 자매가 자결했다고한다. 중국 사서는 자매의 목을 베 소금에 절여 한(漢)의 낙양으로 가져왔다는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 자매의 성격상, 잡히기 전에 자결하지 않았을까?

 

- 후한서에 "구진의 도적인 도양(都陽) 등을 격파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이는 베트남 사서의 도즈엉(Đô Dương) 장군을 말하는 듯한데, 그는 자매 등 여성 지도부가 다 죽은 뒤에도 43년 말까지 산 속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배한 것으로 기록된다. 한서는 도즈엉을 '구진의 도적'이라 표현했다.

 

-하노이, 꽝닝, 호치민, 하이퐁....베트남 전국 곳곳에는 대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하이 바 쯩 거리가 있다. 호치민시 1번가 대로인 하이바쯩로(路) 맞은편은 쯩짝의 남편 이름을 기리는 티 사익 거리가 있다.

베트남 역사에서 자매가 가지는 의미와 위상은 너무도 크고 광대한 것이다.

 

-마원의 군대는 남비엣 침공 초기 풍토병으로 고전했다. 더운 날씨에도 손발을 떨고 다리가 부어 통증을 호소하는 병사가 속출했다. 의이인(薏苡仁)이라는 약재를 먹으면 병이 나았다.

마원은 정벌이 끝나고 한(漢)으로 돌아갈 때 의이인을 수레에 가득 삳고 돌아갔다.

 

 마원의 사후, 양송이라는 자가 황제에게 "마원남비엣 전쟁에서 엄청난 양의 진주를 약탈해 왔는데, 이를 보고도 않고 사사로이 착복했으니 그의 아내와 자손들을 처벌하소서"라고 모함했다.

 

황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진주처럼 보인 동글동글한 물체는 의이인으로 이는 율무의 일종이었다.

마원을 통해 율무가 중국에 전해졌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