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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토미리스' 스텝 초원의 군신(軍神).... 페르시아 지존을 격파하다

지난 2019년 카자흐스탄에서 장대한 스케일의 전쟁 스펙터클 영화가 제작됐다. 아칸 사타예브 감독의 《토미리스-전쟁의 여신》이다. 기원전 6세기 중앙아시아 카스피海 동쪽` 마사게타이 라는 부족의 여왕이 당시 오리엔트를 제패한 대제국 페르시아샤한샤(황제) 키루스 2세를 격파한다는 내용이다.

 

아마조네스 혹은 원더우먼같은 환타지려니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저명한 사학자 헤로도토스가 기록으로 남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기원전 6세기라면....해모수, 혁거세, 주몽의 개국(開國)연대보다도 4~5백년이 앞선 시기다. 토미리스의 위업은 우리에게나 생소한 것이지, 유럽과 중앙아시아에는 그녀를 소재로 한 이야기와 회화(繪畵)가 즐비하다.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토미리스의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토미리스헤로도토스(기원전 484?~기원전 425?)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대 스키타이계(係) 마사게타이 부족의 여왕이다. 태어난 때와 죽은 날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위대한 샤한샤(황제)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0~기원전 530년)와 전쟁을 치렀으니, 관련해 연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영화 속에서 고증하는 토미리스를 보자.

아버지는 마사게타이 족의 왕이었다. 위(位)를 이을 아들이 없어 전전긍긍했지만 딸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어린 딸을 혹독히 훈련해 강인한 전사로 키웠다.

 

어느날, 아버지는 심복 두 명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그녀는 가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 초원을 떠돌며 힘과 세력을 키웠다.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 배신자를 참하고 아버지의 왕위를 잇는다는 내용이다. 복수극의 뻔한 스토리이자 전형적인 영웅 서사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다르게 기술한다.

아버지가 아닌 남편이 마사게타이族의 왕이었다.

왕이 죽자 미망인이 된 토미리스가 뒤를 이었다.

 

헤로도토스는 마사게타이 부족에 대해 "그들이 추격하고자 하면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말 타는데 능숙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다. 다루기 참으로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다"라고 기술했다. 

 

이런 역동적인 종족을 다스리는 토미리스 역시 호방하고 다이내믹한 여성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토리미스가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 계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샤한샤 키루스(2세)의 청혼에서 부터다.

먼저 키루스부터 살펴본다.

키루스라는 인물은 우리에게도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제법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가 키루스를 잘 안다고?

그는 구약성서 에스라書와 이사야書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키루스가 기원전 559년 세운 페르시아 제국을 아케메네스 왕조라고 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이사야서 45장 1절)

 

페르시아 제국에는 수많은 이민족과 그들 고유의 종교, 관습이 혼재했다. 그는 이민족의 '이질'을 배척하지 않았고, '다름'을 수용해 제국의 역량으로 축적했다. 피지배민족들에게서도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보였다.

 

성경에서 "나 여호와(하나님)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기술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고레스(키루스)를 칭송했다. 바벨론제국에 망해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바벨론 유수)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까지 허락한 자애와 관용의 왕이 바로 고레스(키루스)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폰(Ξενοφῶν 기원전 430년경 ~ 354년경)도 키루스를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무력으로 황위에 올랐지만, 합리적이고 배려심 많은 부드러운 리더십의 군주였다.

 

키루스는 기원전 546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강국 리디아를 멸망시켰다.

 

그는 리디아크로이소스를 생포했지만 그를 포로로 대하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 자기 옆에 앉혔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자로도 유명했다.

영어에  ‘크로이소스만큼 부유한’(rich as Croesus)이라는 관용구가 있을 정도다.

학식과 지혜도 남달라 키루스는 그를 평생의 조언자로 삼았다.

 

키루스 인생의 정점은 기원전 539년 신(新) 바빌로니아 점령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오리엔트 최강은 흔히 바빌론제국으로 불리는 신 바빌로니아였다. 유다 왕국과 시리아를 다스리던 바빌론을 멸망시킴으로써 키루스바빌론 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을 해방하고 그들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키루스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나는 바빌론의 왕, 수메르아카드의 왕, 세계 사방의 왕"이라며 스스로를 자찬(自讚)했다.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이룬 키루스 제국의 먼 북방 작은 부족의 과부에게 청혼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제국이 아무리 넓어도, 정복하고 또 정복해도 새로운 땅에 대한 정복자의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

키루스마사게타이의 풍요로운 초원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아무리 정략적 계산에 의한 청혼이라지만 신부의 나이나 외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사료적 정보는 없지만 그녀가 그 시점에서 아주 늙었거나 박색이었던것 같지는 않다.

 

그는 전쟁으로 피를 흘리기 보다는 토미리스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마사게타이를 차지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의 똑똑한 신하들은 "샤한샤께서 왜 저러실까? 땅이 탐나시면 그냥 쳐서 빼앗으면 될 것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토미리스는 키루스의 청혼을 거절했다. 키루스의 속셈을 미리 알아차렸거나, 부족 고유의 관습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관용만큼이나 자부심으로 충만한 위대한 샤한샤는 자신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한 야만인 여왕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심했다.

제국의 궁정에는 토미리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노여움이 들끓었다.

미시게타이 원정은 얻을 것은 적고, 혹시 실수가 된다면 망신만 당할 뿐이라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키루스마사게타이 원정을 고집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마사게타이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기원전 546년 멸망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다. 키루스가 포로가 아닌 친구로 대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토미리스가 전령을 받았다.

"페르시아 대군이 약사르테스 강(오늘날 시르다리야 강 추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토리미스가 말한다.

"키루스에게 전령을 보내라"

 

키루스가 받아본 토미리스의 서신은 "네가 올래? 내가 갈까?".....라는 내용이었다.

토미리스는 "마사게타이 땅에서 싸우고 싶은가? 우리가 3일 거리만큼 물러나 있을테니 강을 건너오너라.

당신들 영토에서 싸우고 싶으면 우리가 건너갈테니 3일 거리만큼 물러나 있거라"는 제안을 했다.

언제, 어디서든 싸워도 우린 자신있다는 말....그야말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토미리스였다.

 

"나의 위엄과 명성을 익히 들었을텐데 항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려하다니..."

키루스토미리스의 강단에 놀랐다.

 

페르시아군은 가벼운 병력의 선발대를 보내 마사게타이 외곽부대를 건드려 봤으나 역부족이었다.

헤로도토스가 극찬한대로 마사게타이 용사들은 빠르고 억센 기병술로 페르시아 선발대를 가볍게 제압했다.

키루스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마사게타이의 전투력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키루스는 자신이 강을 건너겠노라고 답했다.  

토미리스는 약속대로 3일 거리만큼 군사를 물렸다.

이때, 크로이소스키루스에게 '기발한' 작전을 제안한다.

 

키루스토미리스가 물러난 3일 거리만큼 군사를 깊숙이 진군시키지는 않았다. 하루 거리만큼만 진군했다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약간의 부대만 남기고 대부분의 군사에게는 퇴각을 명했는데, 이는 곧 마사게타이군에 포착됐다.

마사게타이의 노장들은 페르시아군의 퇴각이 함정일지 모른다며 즉각적인 추격에 신중했다.

 

마사게타이 전사에게 있어서 달아나는 적을 쫓으며 도륙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 아닌가?

적의 의중을 판단하고 추격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노장들의 생각이었다.

 

이때 마사게타이 사령관은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당대의 용사였지만 공명심이 강했고 피가 너무 뜨거웠다. 

바로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였다.

 

스파르가피세스는 퇴각하는 적을 즉각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후일 밝혀진 대로 페르시아군의 후퇴는 작전상 철수였다. 

 

페르시아군은 마사게타이군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만큼 넉넉한 거리를 두고 후퇴를 감행했다.

그러나 마사게타이군의 추격속도는 놀라웠다.

번개처럼 거리를 좁혀와 페르시아군의 후방을 뒤집어놨다.

키루스는 판단 미스로 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음을 슬퍼했다.

 

달아나는 적을 멀리까지 쫓아가 확인하고 돌아온 기병대는 스파르가피세스에게 "페르시아군이 강 건너 자기 땅으로 완전히 물러났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스파르가피세스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적이 버리고 간 숙영지에 다다랐다.

마사게타이군은 페르시아군 진영(陣營)을 접수한 후 거나하게 잔치를 열었다.

페르시아군이 남기고 간 천막과 병참 창고에는 싱싱한 식재료가 가득 쌓여있었다.

 

그중에는 마사게타이 사람들이 처음 접해 보는 '이상한' 음료가 항아리마다 그득했다.

혹시 독이 풀어져 있나 확인하려고 포로에게 맛보게 했지만 멀쩡하다! 

하급병사가 마셔보니 맛이 기가 막히단다!

고위지휘관을 거쳐 사령관까지 이 달콤한 음료를 마셨다. 

 

먹고 마시고 승리를 노래하며 들썩일때 이를 경계하는 장교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음료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경계심이 풀어지고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발효된 마유주(馬乳酒)만 알던 마사게타이족에게 '포도주'의 위력은 대단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먹고 마셔도 적이 남기고 간 산해진미와 포도주는 동이 날 줄 몰랐다.

졸병에서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이것이 바로 크로이소스가 제안한 '기발한' 작전이었다.

 

밤새 승리의 축제를 즐기고 곯아떨어진 마사게타이군을 향해 페르시아군이 소리없이 강을 건넜다.

트로이는 목마(木馬) 때문에 멸망했지만 마사게타이 병사들은 포도주로 인해 도륙을 당했다.

 

스파르가피세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병사의 80% 가량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자기 자신도 결박을 당한 채 키루스 앞에 널브러져 있는것 아닌가!

 

토미리스마사게타이군이 대패했다는 사실과 아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녀는 키루스에게 즉시 아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간청이나 애원이 아니었다.

 

"아들을 풀어준다면 그대의 군대를 아무탈 없이 돌여보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태양신께 맹세하건대 샤한샤께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피 맛을 실컷 보시게 될 것입니다"

 

 

키루스를 비롯한 페르시아군 지휘부는 기가 막혔다.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이 참에 마사게타이를 아예 지워버리자며 펄펄 뛰는 장수들도 있었지만, 키루스는 역시 관용의 군주였다.

그는 스파르가피세스의 결박을 풀어주라고 명했다.

 

스파르가피세스는 밧줄에서 풀린 후 자신의 군복과 칼을 달라고 했다.

그는 칼을 받자마자 자신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적의 계략에 빠져 포로가 된 것, 어머니의 요구로 풀려나게 된 것.....이 모든 치욕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아아아악~~~!!!!"

토미리스는 아들의 죽음을 듣고 거의 미쳤다.

그녀는 마사게타이을 총동원하고 초원의 스키타이계 형제부족에 도움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제국과 마사게타이의 2회전이 시작됐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헤로도토스가 "헬라인이 아닌 종족의 싸움 중 가장 큰 전쟁였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대규모 병력이었음은 틀림없다.

초원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전투력에 아들을 잃은 어미의 광기가 더 해진 마사게타이군은 사막의 모래폭풍보다 무서웠다. 토미리스는 직접 말에 올라 군의 최전방에 나섰다.

 

적군 사령관을 포로로 잡고, 아량과 조롱 속에 스파르가피세스의 결박을 풀어준 키루스 대왕. 이 싸움은 분명히 페르시아의 압승이라고 방심했던 것일까? 페르시아군은 이제부터 무저갱(無低坑)같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마사게타이군은 초원과 말과 사람이 한 몸인 양 압도적 기승술(騎乘術)을 자랑하며 놀라운 활솜씨로 페르시아군을 공략했다.

 

토미리스는 적의 전방과 좌, 우를 순식간에 에워싼 후, 삼면에서 적을 타격했다.

 

또, 강력한 돌격대를 쐐기삼아 적의 지휘부를 집중 공격했다.

아무리 크고 긴 뱀의 몸뚱이라도 머리를 뭉개면 몸통은 그저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토미리스도 페르시아군의 '머리'쪽에 화력을 집중했다.

 

전투장비를 배열하고, 진용을 짜고, 작전에 의해 가동되는 페르시아군에게는 제대로 된 전법을 미처 펴기도 전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그냥 휘이이이~~~하고 지나가 버린 셈이다.

 

초원에 페르시아군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거의 전멸 수준....살아남은 자들도 여기저기 베이고 찔려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버거웠다.

 

 

이때 한 지휘관이 토미리스에게 달려와 말했다.

자신이 키루스를 덮쳐 그를 베었노라고.

토미리스는 말을 달려 키루스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무수한 시체가 엉켜있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키루스의 시신을 찾아냈다.

페르시아군은 얼마나 처참하게 괴멸됐으면 샤한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달아났단 말인가!

 

토미리스는 태양신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칼을 들어 키루스의 목을 내리쳤다.

 

토미리스는 군대를 물려 자신의 궁(게르 형태의 천막이었을 듯)으로 돌아왔다.

그는 피가 가득 담긴 가죽부대에 키루스의 머리를 담갔다.

"너는 계략으로 내 아들을 죽였지만, 나는 피에 굶주린 너에게 그 갈증을 풀어주겠노라"

 

 

이 극적인 장면은 후세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했고, 창작 모티브가 돼 수 많은 버전으로 표현됐다.

키루스가 변방 부족의 여왕에게 당한 처참한 최후는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한쪽 눈을 잃고 패주한 당태종의 망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토미리스는 연대적으로 세계 최초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진다.

기록상 그녀보다 이른 여성군주는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이야기들

 

-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페르시아마사게타이 혹은 스키타이족 전체를 겨냥해 복수를 했는지, 토미리스의 이후 생애가 어땠는 지는 알 수없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마사게타이쪽 사료를 기대하는 건 난망하다. 페르시아 측 자료에 기대야 하지만, 이 조차 훗날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할 때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키루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 토미리스에 패해 죽음(헤로도토스역사) ▲데르비케스족과 싸우다 창상을 입어 죽음(크세시아스-아케메네스 왕조의 역사가) ▲평화로운 자연사 (크세노폰-그리스 역사가)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키루스보다 100년 뒤의 사람인 헤로도토스는 여러가지 기록과 설, 구전을 종합해  자신이 기술한 토미리스 관련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크세시아스와 크세노폰키루스 신봉자로 그의 황망한 죽음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키루스의 사망연대는 기원전 530년으로 향년 70세였다.

 

- 그렇다면 대제국 페르시아의 후대왕들은 복수도 하지않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우선 키루스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이집트와의 전쟁과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가우마타의 반란 진압에도 버거웠다.

그 후임인 다리우스 1세가우마타 세력의 제거, 그리스 연합과의 전쟁으로 생애를 보냈다.

다음이 영화 〈300〉으로 유명한 "나는 관대하다"의 크세르크세스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 대왕)로 그 또한 그리스와의 전쟁, 리비아, 아라비아, 카프카스아랄해 정복으로 일생을 보냈다.

 

- 스키타이족은 정체성을 도통 알기 어려운 신비로운 집단이다. 흉노(凶奴)와 (Huns)族, 돌궐(突厥)과 튀르크의 연관성에 대해 온갖 추측과 학설이 있지만 딱 부러진 정설을 자신있게 내 놓지 못하듯, 스키타이도 그런 존재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서 기술한 스키타이은 주로 흑해 연안과 캅카스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말한다.

그러나 훗날 유럽에서 몽골족을 흔히 타타르라고 일반화 해 불렀듯이 수 많은 종족이 분포된 스텝지역의 유목민을 싸잡아 스키타이라고 부른 것은 인류사적으로 큰 오류가 아닐수 없다.

 

이들은 대략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의 스텝 지역에서 번성했으나 독립된 국가나 제국으로 성장하진 못했다. 그후 서기 4세기 경까지도 가늘게 명맥을 유지하다가 유럽, 아랍, 중앙아시아, 간다라 지역 등으로 희석돼 사라졌다. 세익스피어가 리어왕에서 "야만적인 스키타이인..."이라 언급한 것처럼 스키타이에 대한 유럽의 인식은 대단히 적대적이고 왜곡된 것이었다.

 

- 토미리스는 정말 토미리스일까?

 

흉노(凶奴)는 자신들을 정말 흉노라 칭했을까? 소서노(召西奴)는? 노힐부득(努肹夫得), 흑치상지(黑齒常之)는?

흉한(凶) 노비(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렸을리 없고, 소서노는 〈소〉〈서〉〈노〉라고 발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기 이름에 '종' '노비'라는 뜻의 노(奴)자를 사용할리 만무하다.

칭기스칸(Ghinggis Khan)을 한자로 표기했을 때 성길사한(成吉思汗)이 된다.

노힐부득, 달달박박, 흑치상지, 을지문덕이 그들의 실제 이름이 아님은 확실하다.

 

고대에 문자가 없던 민족은 조상의 실제 이름이 어떻게 발음됐는지(mother toung) 알 수없다.

토미리스라는 이름도 '그리스인의 귀'로 '스키타이인의 입'에서 나온 발음을 듣고 기술한 것이다.

그리스 문자가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발음이 크게 왜곡되진 않았겠지만, 토미리스는 어쩐지 서방적인 느낌의 발음이다. 자신들을 사카라 불렀다는 스키타이인들의 발음으로는 토미리스가 아닌 타우무리야라는 설명도 있다.